(10)느리지만 합리적인 인니 근로자들|"빨리 하라" 재촉 안 통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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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 기업인이나 근로자들이 가장 빨리 배우게 되는 인도네시아 말이「째빳 째빳」(빨리 빨리)이다.
열대 기후 탓에 이 나라의 국민들은 성질 급한 한국사람의 눈에서 보면 느리기 짝이 없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현지 근로자들을 재촉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의 경제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던「째빳 째빳」은 인도네시아에서 생산성을 높이기보다는 현지 근로자와의 마찰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작년 7월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한국의 몇몇 기업에서 한국과 인도네시아의「문화적 충돌」로 심각한 노사 분규가 일어났고 결국 군대까지 출동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20여 년 전부터 진출한 일본의 기업들이 큰 마찰이 없었던데 비해 해외 진출 2∼3년만에 한국 기업들이 현지인의 눈총을 받게 된 것은 국민성과 투자 방식의 차이 때문이다..
일본은 글로벌 전략에 따라 세계를 거미줄처럼 엮어 놓고 기술력을 바탕으로 지역에 맞는 투자 전략을 세워 나가고 있는 반면 한국은 경쟁력을 잃은 업종을 중심으로 값싼 임금을 노려 개발 도상국가에 진출했기 때문에 현지 근로자들을 닦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인니 문화 이해부터>
국내의 고 임금을 피해 앞다투어 해외로 달려나갔지만 현지화 전략의 부재로 고전하고 있는 기업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경제의 국제화를 위해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는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는 게 현지에 진출한 업체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다만 과거처럼 임금만을 따먹는 식의 진출은 한계가 있으며 산업별 경쟁력의 면밀한 분석을 통한 효율적인 투자전략의 마련이 선행돼야 한다.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신발 업체로 인해 국내 신발 업계가 고전, 부머랭 효과가 논란이 되고 이에 따라 신발 업계의 해외 진출이 제한되고 있지만 몇몇 현지 법인은 나름대로 성공을 거두고 내수 시장까지 파고들고 있다..
국내 5∼6위의 신발 업체인 성화가 인도네시아에 설립한 성화두니아㈜의 경우 국내에서는 고가 품, 인도네시아 현지 공장에서는 저가품을 만들어 제3국으로 수출하고 있으며 내수시장을 겨냥한 신발 브랜드를 개발, 제품 수준에 따른 차별화 전략을 펴고 있다.
이 회사가 인도네시아에 진출한 계기는 다른 업체와 마찬가지로 국내의 고 임금으로 더 이상 채산성을 맞추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나이키·아디다스 등 해외 유명 상표를 주문자 상표 부착 방식으로 수출해 오던 성화는 지난 87년 이후 국내 임금이 급격히 오르자 인건비가 싼 인도네시아로 눈을 돌렸으며 89년부터 현지 공장의 가동에 들어갔다.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서쪽 68km떨어진 세랑에 자리잡고 있는 성화두니아는 현재 10개 생산라인에 6천5백여 명의 종업원을 두고 있으며 이곳에서 만든 신발을 지난해 4천5백만 달러 어치나 수출했다. 대지면적은 5만여 평, 생산라인 한 개의 길이가 2백70여m에 이른다.
성하두니아의 이인재 상무는『인도네시아의 공장에서는 한 켤레에 10∼15달러, 한국에서는 2O달러 수준의 고가 품을 만들고 있다』며『인도네시아 근로자의 생산성은 한국의 80%수준이지만 인건비가 한 달 50~60달러로 비교가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상무는 또『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열대 기후 때문에 느린 게 흠이지만 손재주가 좋고 성실해 품질이 한국에 못지 않다』고 말하고『일부 업체에서 현지 근로자와 충돌을 빚고 있는 것은 인도네시아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현지화 전략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성화두니아가 노무 관리에 성공을 거둔 것은 근로자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무리하게 서두르지 않고 현지 문화에 적응하려 노력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데려가는 책임자급 근로자를 최대한 줄이고 (현재 67명)총무 부장을 현지 인으로 앉혔으며 노조를 만들도록 유도, 대화 창구를 마련했다.
식당은 4천명이 동시에 식사할 수 있도록 했고 출퇴근을 위한 버스가 43대나 된다.
성화는 현재 수출을 위해 만드는 신발의 원·부자재를 모두 한국에서 가져가고 있다. 현지 법인의 수출로 한국에서의 제품 수출은 줄었지만 원·부자재의 수출로 이를 만회하고 있는 것이다.

<브랜드 개발도 시급>
인도네시아의 전체 신발 수출(91년 약 6억 달러) 에서 한국의 현지 법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50%에 이른다.
이는 한국의 신발 수출에서는 빠져 있는 통계다.
성화는 이와 함께 스타몬(STARMON)이라는 신발 브랜드를 만들어 인도네시아 내수시장에서 고급 브랜드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스타몬의 소매점은 4백50개에 이르며 작년 말에는 점주들을 호텔에 초청, 단합 모임을 갖기도 했다.
스타몬은 90년 초부터 제품 판매에 나서 5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으며 지난해에는 1천만달러로 두 배 늘어났다.
성화의 최호생 이사는『국내의 고 임금으로 해외 진출이 불가피했으며 앞으로 국내 공장의 생산라인을 대폭 줄이고 해외에 중점을 둘 계획』이라고 말했다.
인도네시아에 한국 업체가 진출함으로써 한국의 신발 수출이 인도네시아에 잠식당하고 있다는 부머랭 효과가 국내에서 문제가 되고 있으나 성화의 사례에서 보듯 반드시 해외 진출을 금기시 할 필요는 없다·
현지 진출 업체의 한 관계자는『아직 인도네시아인 만으로는 신발을 만들지 못하며 한국인 근로자가 들어가야 공장이 제대로 돌아간다』고 말하고 『한국에 모 기업이 있고 우리가 기술을 갖고 있는 이상 부머랭 효과를 지나치게 겁낼 필요가 없으며 한국의 국제화를 위해 모든 부문에서 해외투자를 늘려야 한다』고 밝혔다.
㈜서광의 현지법인인 서광 인도네시아의 박길봉 사장도『의류의 경우도 고가 품을 개발하지 못하면 쓰러질 수밖에 없으며 저가품은 해외로 눈을 돌려야 한다』며『일본의 경우도 우리와 같은 과정을 밟았으며 그 결과 일본은 지금도 여전히 섬유 선진국』이라고 말했다.
서광 인도네시아는 90년10월 자카르타 시내에 있는 기존의 공장을 인수, 8개의 생산라인에서 코트를 만들고 있는데 앞으로 국내 공장은 내수에 전념하고 현지 공장에서 만든 제품을 수출할 계획이다.
신발과는 달리 봉제업은 국내에서 이미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고 있으나 일찍부터 해외에 눈을 돌린 업체는 나름대로 경영 성과를 얻고 있다..
세계물산의 경우 지난 88년 직접 투자를 하지 않고 기술 협력 형태로 인도네시아 반둥에 진출, 이곳에서 생산하는 물건을 전량 제3국에 수출하고 있다.
원래 회사 이름이 대우 어패럴 이었던 이 회사는 5공 말기 구로 공단 노사분규의 시발점이 됐었으나 대우 어패럴 사건을 계기로 국내 공장의 생산라인을 줄이고 인도네시아에서 하청생산을 해 오고 있다.
인도네시아 공장의 시설은 현지 인이 댔으며 원료와 기술은 한국이 맡고 이익은 양측이 반분하고 있다.. 한국인 기술자 23명이나가 있고 현지인 근로자는 2천4백50명.
세계물산의 김병삼 상무는『인도네시아의 생산성은 다소 떨어지나 점퍼와 바지 류의 품질은 한국보다 오히려 낫다』며『초기에는 라인 연결이 잘 안돼 애를 먹었으나 최근에는 많이 나아져 올해부터는 큰 이익을 기대하고 있으며 원자재는 전부 한국에서 가져가고 있다』고 말했다.
김 상무는『부머랭 효과가 아니더라도 인건비 때문에 봉제업은 저 임금 국으로 가게 돼 있으며 결국 생산 체제를 국제 분업 형태로 유지하고 브랜드의 개발을 통해 살아남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세계물산은 현재 미얀마와 터키 등에도 생산라인을 갖고 있는데 임금이 한국의 70% 수준에 올라있는 터키에서는 비교적 기술이 필요한 신사복을 주로 만들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가 한국의 유망 투자 대상 국가로 떠오르고 있으나 아직 한국의 투자는 기술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낮은 임금만을 겨냥한 것이어서 많은 문제를 안고 있다.
인도네시아에 대한 한국의 투자는 67년 이후 87년까지 18건에 불과했으나 88년 이후 섬유·봉제·신발 업체를 중심으로 2백50여 개 업체가 봇물 터지 듯 앞다투어 진출했다.
물론 국내의 고 임금과 노사분규를 피해서였다.
한국의 인도네시아 투자 규모는 지난해 9월말 현재 22억 달러로 일본(1백10억 달러)에는 비교가 안되지만 5위의 투자대국이다.
한국 업체가 고용하고 있는 인원은 10만명에 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업체는 인도네시아 근로자를 한국의 경제 개발 초기의 노무 관리 수준에서 다루다가 한국에 대한 인도네시아의 인상을 흐려 놓고 있다.
국내 진출 업체끼리의 과당 경쟁과 인력 스카우트 경쟁도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고 관광객들의 추태도「어글리 코리안」의 이미지를 심어 놓고 있다.

<과당 경쟁 자제해야>
인도네시아의 공항에서는 한국 관광객들을 골라잡아 금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적지 않으며 일부 술집에서는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술을 먹고 병을 깨뜨리는 등 술주정을 부리는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국내업체의 한 관계자는『인도네시아 인들이 오랫동안 네덜란드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합리적인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합리적으로 설득하면 무리가 전혀 없다』고 말하고『오히려 한국에서 데려가는 우리 근로자들의 수준이 낮아 마찰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인도네시아의 외국인 투자 허가 기관인 BKPM의 라시디 부위원장은『한국은 대규모의 투자를 하고 있으나 너무 빠르게 투자 성과를 기대하는 것 같다』며『한국인들은 인도네시아 근로자를 군대식으로 혹독하게 다뤄 분규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고용 증대를 위해 한국 업체의 투자를 반기면서도 노사 분규가 정권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점을 크게 우려하고 있으며 인도네시아의 한국 대사관에서는 작년 하반기 이후 현지 진출 국내 업체를 대상으로 문화적 충돌을 막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대사관의 한 관계자는『우리 경제의 국제화가 시급한 만큼 더 많은 해외 진출이 필요하지만 돈만 들고 해외에 나서는 것은 국제화가 아니며 무엇보다 한국사람들이 외국에서 그들과 더불어 이해하며 살 수 있는 국제화 마인드가 정립돼야 한다』고 지적했다. <글=길진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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