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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 총재 '물가 실력'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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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안정'.

한국은행 본관 로비의 높은 벽 위에 걸려 있는 대리석 현판에 새겨진 문구다. 현판 크기는 가로가 4m가 넘는다. 이 현판을 내건 때는 1998년 초다. 당시 한국은행법 개정과 함께 한은의 목적을 종전 '통화 가치 안정과 은행신용제도의 건전화'에서 '물가 안정'으로 바꾸면서 그 뜻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만큼 물가 안정은 한은의 핵심 기능이다.

그러나 올 들어 물가가 심상치 않다. 1~3월 중 국내 소비자 물가는 전년 동기 대비 2.1% 올랐다. 아직 한은이 내세운 올 물가 관리목표(2.5~3.5%)를 넘어서진 않았지만 이미 턱밑까지 올라온 수준이다.

한은은 원유 등 국제 원자재 가격이 치솟고, 이에 따라 수입물가의 고공 비행을 주범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똑같은 외부 환경을 놓고 유독 한국의 물가만 불안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 일본은 올 1분기 중 소비자 물가가 0.05% 하락했다. 미국 소비자 물가는 3월에 0.7% 오르는 데 그칠 전망이다. 미국에선 이 정도의 물가 상승에도 벌써 인플레이션 걱정을 하고 있다.

최근 3년간 진행된 원화 강세 덕에 그동안 물가 걱정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국내 물가는 2%대 내외의 안정세를 보였다. 부동산 폭등이 나라를 흔들 때도 박승 전 총재는 "강남 집값을 잡으려면 교육제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한가한 해법을 내놓았다. "물가에 대한 우려를 할 단계가 아니다"는 판에 박힌 레코드만 틀어놓은 채.

한은은 이제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 한은 김병화 부총재보는 "최근 국제 원자재 가격이 다소 오르고 있으나 우려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은에 유리했던 주변 상황이 일제히 불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원화 환율이 바닥을 치고 반등하면서 국제 원자재 가격 상승이 고스란히 국내 물가에 전가되고 있다. 물가를 잡겠다고 함부로 금리를 올리면 부동산 가격 급락과 경기 침체를 초래할지 모른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다간 물가 불안이 경제를 위협할 수도 있다.

원래 중앙은행의 진면목은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서 발휘된다고 한다. 이성태 한은 총재는 자주 "경제 흐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겠다"고 공언했다. 이제 그 약속이 제대로 실천될지 두고 볼 일이다. 한은 로비의 '물가 안정'이란 현판 문구가 어느 때보다 크게 눈에 들어온다.

홍병기 경제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