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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유권자가 후보들 깨웠다/현장에서 지켜본 “열전17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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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취재기자 방담/대권주자들 지역감정만 부채질/선관위·시민단체 역할 두드러져/투쟁성 구호대신 경제문제 부각/국민당변수 돌출 선거관심 제고
­14대총선의 열전 17일간의 선거운동이 모두 끝나고 이제 유권자들의 선택결과만 남았습니다.
이번 선거결과는 특히 집권당과 야당의 차기대권후보 결정에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어 주목됩니다. 우선 이번 선거의 특징적인 양상부터 정리해봅시다.
­13대총선까지 주요 이슈로 등장했던 정치성·투쟁성 구호가 거의 사라지고 경제문제와 지역발전·민생치안문제 등 유권자의 피부에 와닿는 구호가 전면에 부각됐습니다. 민자당은 『안정의석을 확보해야 경제난을 헤쳐나갈 수 있다』고 하고 민주당은 『야당이 견제력을 가져야 물가를 잡을 수 있다』고 합니다. 국민당은 아예 6공의 경제실정만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요. 이 때문에 쟁점이 두드러지지 않은 선거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이제 민주대 반민주식 선거운동의 시대가 지나가고 선진국 형태의 경제실정비판등 실생활문제의 해결능력이 표를 주는 기준이 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그나마 선거라고 할만한 분위기를 만든 것은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씨가 앞장선 국민당의 출현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에피소드를 생산해내고 희극적인 요소까지 가미시켜가면서 바람을 일으킨 것은 사실입니다. 물론 유권자의 표와 연결될지 여부는 별개로 치더라도 선거에 「재미」라는 요소를 가미시켜 바람을 일으켰어요. 아무리 재벌이 돈으로 급조한 당이라지만 국민당 바람은 기존정치권에 대한 식상감이 얼마나 컸나 하는 점을 너무도 뚜렷하게 부각시켜 정치권에 충격을 주었죠.
­총체적으로는 언론과 공선협 등 시민단체·선관위의 활발한 캠페인에 힘입어 공명선거 분위기가 많이 정착된 것도 평가할만 합니다.
물론 음성적으로 뒷거래가 성행했고 관권개입도 적지 않았지만 무차별한 금품살포 등은 확실히 줄어들었습니다.
­그만큼 유권자의 의식은 깨어가고 있는데 후보자들의 수준이 그에 못미친다고 봐야겠지요.
­더구나 여야 지도자들이 총선을 대권 전초전으로 간주,지역감정을 부채질한 것은 냉정히 비판돼야할 대목입니다. 특히 김영삼 대표를 비롯해 김종필 최고위원등 민자당의 두 김최고위원은 경쟁적으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다녔죠. 김대중 대표도 말할 것이 없지만….
­각 정당의 선거전략과 기대치를 한번 점검해봅시다.
­민자당은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직전 국회의장단과 상임위원장단을 석권할 수 있는 57% 의석확보를 목표로 잡고 또 그 정도는 가능할 것으로 보았습니다. 민주당은 김대중 대표에 대한 비호남권의 거부정서가 강해 크게 약진하기는 어렵고 국민당도 재벌혐오의식 때문에 크게 주목을 끌지는 못할 것으로 본거죠.
­이런 계산에 혼란을 갖고 온 것이 국민당이죠. 새로운 홍보선전기법에 엄청난 자금,자의든 타의든간에 끝없이 만들어내는 화젯거리로 국민당은 주목을 끌었고 안기부나 정부의 어설픈 대응이 결과적으로 국민당을 키워준 셈입니다. 따라서 선거중반에는 과반수의석도 어렵다는 얘기까지 나왔지만 23일에는 『55∼60%의석 확보는 무난할 것 같다』는 입장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민자당이 그동안 엄살을 피운건가요. 13대총선때는 너무 많이 될까봐 표정관리를 못해 국민들의 반발을 유발시키는 바람에 여소야대가 됐다는 얘기도 있지 않습니까.
­엄살기가 없는건 아니죠. 그렇지만 강용식 대변인이 23일 『국민당이 여당표만 깨는줄 알았는데 이제보니 민자당에 도움도 주더라』고 한 말은 새겨보아야 할 것입니다. 국민당에 힘이 붙으면서 급기야 야당표도 상당히 잠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민주당은 처음부터 개헌저지선 확보를 위해 지역구 78∼80석 획득을 목표로 잡았지요. 선거기간중 특별한 야당바람은 없었지만 6공의 경제실정 비판과 견제논리 등이 먹혀들어 수면아래에서 조용한 표의 흐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지난해 지방의회선거에서의 악몽때문에 과거의 투쟁위주 선거방식을 지양하고 야당의 합리성을 부각시키려고 애썼지요.
그 때문에 선거에서 이슈를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얘기도 있었지만 『악재를 만들지 않고 기다리다보면 민자당에서 악수를 두게 돼 있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민자당과 국민당의 싸움을 느긋하게 지켜보면서 어부지리를 챙길 계획이었지만 상승세를 타던 수도권의 분위기가 주춤하게 된 것은 자체분석결과 국민당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이 때문에 민주당내에서는 국민당에 대한 공격시기를 못맞춘데 대해 반성하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어쨌든 선거결과에 조바심을 가지면서도 개헌저지선 확보가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반 우려반의 심정인 것 같습니다.
­얘기가 자꾸 국민당과 연결되는데 그만큼 이번 선거의 최대변수로 등장한 것이 국민당이라는 뜻도 되는거죠. 국민당내에서는 자신들을 어떻게 봅니까.
­국민당은 다른 당의 엄살작전과는 달리 부풀리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초 원내교섭단체 구성을 목표로 했다가 분위기가 좋아지는듯 하자 조윤형 선거대책본부장은 최저 35석,정주영 대표는 23일 최저 70석을 장담하더군요. 그러나 실무선에서는 지역구 17∼18석 정도를 당선가능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건 뚜껑을 열어봐야 알겠지요. 하여튼 민주당이 못메운 정부와 민자당에 대한 불만을 포착,노대통령의 무능과 경제실정에 초점을 맞춘 것이 효과적이었다는 분석입니다. 혹세무민한다는 비난도 받았지만 『아파트분양가를 절반으로 낮추겠다』는 얘기등은 서민들로서는 귀가 솔깃한 내용이지요.
­민자당은 국민당을 재벌정당으로 격하시키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은 듯한 분위기입니다. 국민당은 우선 선거운동의 기법이 민자당을 훨씬 앞서나가 아픈데를 콕콕 찌르는 듯한 발언을 많이 했지요.
민자당은 자신들의 청년조직에서 떨어져나간 「두잇 이벤트」소속원들을 구속시켰다가 역공을 당했을 뿐 아니라 정대표의 국회의원 후보 자격문제도 부머랭처럼 민자당으로 돌아갔습니다. 벌이는 일마다 판판이 깨진 셈이죠.
­민자당 강용식 대변인의 정례기자간담회 내용의 대부분이 국민당을 공격하는 것이었죠. 그만큼 국민당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다는 거겠죠. 그래서 「국민당 쇼크」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그게 「깜짝쇼」 로 끝날지,아니면 현실로 나타날지가 흥미롭습니다.
­국민당이 선거에 마키팅원리를 도입했다는 얘기까지 나올 정도입니다. 그만큼 기성정치권에 준 충격이 컸다는 뜻이죠.
­민주당은 지역감정 조장과 정치적 대결을 가능한한 피해보려는 생각때문에 국민당의 대여 공격을 팔짱끼고 즐기는 입장이었죠. 강건너 불인양 지켜보다 보니 어느새 발등의 불로 변한 셈입니다. 국민당은 재벌정당이란 부정적 요소만 없었더라면 양김씨와 기성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기반으로 엄청난 태풍을 정계에 몰고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여야 수뇌부들이 「세확보」를 위해 지역감정을 자극하는 선거운동을 해서 지탄을 받았지요.
­여야 수뇌부들은 자신의 지지기반에서는 싹쓸이를 한다는 전제아래 선거전략을 수립,그대로 실행했습니다.
­이번 선거에서는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먼저 시작했지요.
­그렇습니다. 김대표의 대권바람몰이 전략이 지역주의와 맞아 떨어지면서 바람이 불자 부산·경남지역 후보들은 『김대표를 차기 대통령으로 모시는데 뼈와 살을 깎겠다』는 공개적인 충성서약에서부터 『대통령은 김영삼,국회의원은 아무개』라는 구호가 공공연히 나돌지 않았습니까.
­5공의 대표주자격인 허문도 후보(무소속·충무­통영­고성)조차 『김대표는 내가 민다』고 공개서약까지 했던 일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민주당 김대중 대표는 대권과 연계한 지지호소 발언은 삼갔지만 호남지역 또는 호남출신의 타지역 후보들은 공공연히 김대표 대권도전과 이번 총선승리를 연결시켰고 김대표도 이들 발언을 묵인했지요.
­민자당 김종필 최고위원이 「중부권 역할론」을 들먹인 것도 그렇고 「1노3김」구도 청산과 「새정치」를 주장해 온 국민당 정주영 대표까지 가세해 「강원도당」을 자처하고 나선 것은 지역감정의 망령을 정치지도자들이 선거때마다 되살리려 한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여론입니다.
­어쨌든 대권주자들이 많이 나섰어요. 종로에서 4선을 노리는 이종찬 의원은 그동안 누차 대권도전을 시사한 바 있어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한렬·김종호 의원 등이 대권도전 또는 15대 도전의사를 밝혔죠. 김복동씨 등은 「큰일」을 할 사람으로 부각됐고요.
­이번 선거에서 선관위가 보여준 역할은 괄목할만한 발전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적인 예로 13대총선때는 선관위가 고발한 불법선거운동이나 단속사례에 대한 기록자체가 남아있지 않다는 점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선관위의 공명선거 의지도 큰 몫을 했지만 시민단체들과,특히 언론의 뒷받침이 선관위에 상당한 힘을 줬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선관위가 정부기관의 영향권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더군요. 선관위 실무자들 사이에서는 권력기관등과의 사전협의 때문에 고충이 많다는 얘기들이 자주 튀어나오는 것을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윤관 위원장은 선관위원장이 된 이후부터 언론인들을 제외하곤 정·관계 인사들과의 사적인 만남을 일절 거절하고 있다고 털어놓을만큼 나름대로 무척 노력하고 있는 모습임에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사법적 권한이 없고 고발조치하는 것이 최대무기인 선관위가 공명선거 풍토조성을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는 있지만 이같은 문제점들을 조속히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이번 선거양상을 점검해보면 정당과 후보자,그리고 관권행정선거시비를 일으킨 정부의 태도는 크게 달라진게 없지만 유권자들의 공명선거에 대한 의식수준은 상당히 향상됐다는 평입니다.
­그렇습니다. 우선 두드러진 현상은 선거기간중 선물공세와 선심관광 또는 합동연설회장의 폭력사태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또 후보들도 13대만 하더라도 무차별적인 벽보 부착·홍보물 배포 등을 밥먹듯 해왔지만 이번의 경우는 이러한 불법사례가 눈에 띄게 줄었지요.
­그만큼 우리 유권자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증거죠. 게다가 일단 선거법 위반으로 걸려들면 크든 작든간에 상당한 감표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점이 후보들에게 심리적 압박감을 주고 있는 점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선물은 표가 나는데다가 원체 언론의 집중타를 맞아 사라졌지만 음성적으로 돈봉투를 돌리는 것은 여전한 것 같아요. 과거처럼 빈민촌이나 취약지대에 무차별적으로 살포하지 않아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그 수법이 갈수록 은밀해지고 액수는 거액화되고 있다는 것이 선거관계자들의 솔직한 얘기이니까요.
­일례로 후보나 후보운동원과 인간적 친분 때문에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유권자들을 대상으로 은밀히 돈봉투를 건네주는 수법이 보편화되고 있고 액수도 과거에는 2만∼3만원하던 것이 최근 들어서는 5만원짜리 봉투도 생기고 동네에서 말깨나 하고 사람 모을 수 있는 사람들에겐 10만원,20만원도 주었다는 겁니다. 단속이 강화되면 될수록 단속망을 피해가는 노하우도 지능화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청주의 민자당 후보는 아파트 경비원들을 구워삶아 홍보물 배포나 호별방문을 자유자재로 하는 반면 타후보측의 접근은 경비원들로 하여금 철저히 차단하는 수법을 개발해 효과를 봤다고 자랑하더군요.
­이번 선거에서 가장 큰 문제는 뭐니뭐니해도 관권선거 시비 아닐까요.
­물론입니다. 관권·행정선거 시비는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니지만 이번 선거의 최대 이슈로 관권선거를 빼놓을 순 없습니다. 여당공천 낙천자들의 무소속 출마포기 압력 시비에서부터 정호용씨 택시미행사건,이주일씨 출국사건,울산도청사건,무주·음성군 선거대책 문서 작성건,안기부직원의 민주당 홍사덕 후보(강남을) 흑색유인물 배포,군부재자투표 부정혐의건에 이르기까지 관권개입시비가 끊이질 않았으니까요.
­공무원의 잦은 출장,지방일선기관의 음양에 걸친 여당후보 지원,공무원의 유세장 출장 등은 과거 선거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입니다. 일부에선 오히려 심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어요. 노대통령의 연두순시지시는 너무 노골적이었고요.
­역설적인 얘기이지만 지역감정이 고조됐던 13대 선거시 호남에서관권개입시비가 아예 거론조차 안됐는데 이번 총선에서는 호남에서도 행정기관이 여당후보를 내놓고 지원한다며 야당후보들이 불평을 하더군요.
흑색선전이 아직까지 뿌리뽑히지 않은 것도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입니다.
­안기부 직원이 배포한 홍사덕 후보에 대한 흑색선전이 대표적인 예이지만,경산­청도의 이모후보에 대해서는 『조상의 산소를 호화분묘로 치장했고 축첩자이며 친일파 후손』,대전의 김모후보는 『부인이 4명에 전과10범』,남모후보는 『아버지가 일제때 고등계 형사』라는 흑색선전이 나도는등 갖가지 흑색선전이 난무했던 것 같습니다.
­수원의 한 선거구에서는 『두명의 후보가 첩을 데리고 산다』는 괴문서가 나돌자 합동유세때 이들 후보들이 가족들을 데리고 나와 일일이 호명하며 사실무근을 주장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습니다.
­후보자들이 학력을 속이는 경우도 많더군요. 경기도의 박모후보가 허위학력을 기재한 사실이 들통나 망신을 당한 예도 있지만 부산의 거물정치인 최모후보등도 학력을 과대포장한 사실이 밝혀져 톡톡히 창피를 당했어요. 이것은 정말 그냥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부분입니다. 앞으로 학력·경력을 허위기재하면 등록취소를 하든지 해야지요.
­그런 풍토때문에 외국에서 대학원을 나왔다거나 국내 대학의 경우도 특수대학원을 수료했다고 하면 일단은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번 선거과정에서는 가수·탤런트·영화배우·국악인 등 연예인들이 대거 동원됐다는 점도 새로운 양상으로 꼽을 수 있을 겁니다.
­국민당 창당대회에 코리아나등 유명연예인 10여명이 동원된 것을 비롯해 여야 할 것 없이 지구당 창당·개편대회에 연예인들을 출연시켜 딱딱한 선거분위기를 축제분위기로 만들려고 했지요.
­근 1백명에 가까운 연예인들이 선거지원에 나섰고 이중엔 겹치기 출연도 있었어요.
연예인들은 또다른 대목을 봤던 것 같아요.
­서울 송파구의 한 민자당 후보는 가족들과 휴일 나들이를 오는 인파들을 겨냥해 롯데월드 옥외주차장에서 정당연설회를 열면서 안재형­자오즈민 부부,홍차옥·유남규 등 탁구선구들의 사인회를 갖기도 하고 강남구의 민자연설회에서는 가수 조영남씨가 직접 피아노 반주로 『아침이슬』을 열창하는 모습도 보였습니다.
­이젠 국민의식이 바뀌고 있는 겁니다. 여야 정당들이 그런 변화를 어떻게 파고들었는지,투표의 결과가 참 흥미롭습니다.<정리=김두우·문일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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