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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교과과정의 모순(벼랑에선 교육 21세기대비위한 긴급진단:12)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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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학기당 22과목 “잡화상식 수업”/능력·적성 아랑곳없이 획일적 교육/고3 절반 “가망없다” 수업 중도포기
지난해 12월 서울 S대 기악과에 응시했던 K양(18)은 합격자명단에서 자신의 이름을 확인하는 순간 성취감에 앞서 깊은 허탈감을 느꼈다.
이 한순간을 위해 지난 3년간 그 고생을 해야만 했는가­.
피아니스트가 꿈이었으면서도 대학관문을 뚫기위해 영문학과나 법학과 등을 준비하는 친구들과 다를것 없는 공부를 하면서 이질감을 느꼈던 교실. 자그마치 25개가 넘는 학과목의 암기와 시험. 음악적 정서를 함양할 여유가 도무지 없는 꽉찬 일과와 기계식 레슨.
K양은 이런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음악인이 되려는 자신에게 시험준비로만 끝나버린 여고시절이 너무 건조하고 낭비가 컸다는 생각을 했다.
K양이 느꼈던 회의처럼 우리 교육과정은 낭비와 모순이 많다. 너무 획일적이고 학습부담이 크다.
학생들의 능력이나 관심·흥미 등과는 관계없이 국가가 정한 기준에 따라 전체학생에게 같은 내용을 같은 방법으로 가르쳐 교육의 효율을 떨어뜨린다. 마치 공산품을 만들어내듯이 학생들을 가르쳐 틀에 맞는 규격품을 만들어 내는 것이 목표인 듯하다. 그러면서 교육의 본질은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전과목 「필수」화
교육과정의 획인하는 교과목편제가 사실상 모두 필수과목이라는 점에 단적으로 나타난다.
현행 교육과정을 보면 고등학교의 경우 3년동안 이수해야할 26∼27개 과목중 21∼23개가 사실상 필수과목이다. 학생이 흥미와 능력등에 따라 자신이 공부할 과목을 선택할 여지가 없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14개 과목을,독일 바이에른주가 16∼18과목을,프랑스가 12∼17과목만을 각각 필수로 하고 나머지는 학생이 선택할수 있도록 50∼1백50개의 선택과목을 개설해놓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나라 교육과정의 획일화가 어느정도인지 알수 있다. 획일성의 문제는 이수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우리나라 일반계고교의 경우 이수과정은 현재 인문·자연·직업 등 3개로 구분되어 있어 학생의 적성·능력·진로에 적합한 교육에는 미흡한 실정이며 학습부담의 한 요인이 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교육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예를 들어 예체능계 대학을 진학할 학생이라면 지금처럼 인문계학생과 똑같은 과목을 같은 시간만큼 공부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교육과정상의 또 한가지 문제는 학습부담이 크다는 점이다.
고교생의 경우 우리 학생들이 한 학기당 이수해야할 과목수는 19∼22개로 미국의 5∼6개,일본의 8∼13개(학년당),프랑스의 9∼10개(학년당),영국의 5∼6개(학년당) 등에 비교하면 대단히 많다. 이같은 학습부담이 심층적인 수업보다는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암기학습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학생소외감 심각
김두정 충남대교수(교육학)는 학습부담이 과중한 데 대해 『교육과정상의 구조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교과서의 내용의 범위가 넓고 분량이 많은 것도 문제』라고 지적하고 『그동안 교육과정 개편과정에서 새로운 교육영역이 나타날 때마다 전반적으로 재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추가하는 작업을 반복해온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교육과정의 획일화와 과중한 학습부담은 입시위주의 교육이라는 특수한 풍토와 맞물려 각종 교육적 부작용과 비효율성을 더욱 크게하고 있다.
많은 학생들이 느끼는 소외문제가 대표적인 예다.
고교 3학년 학급은 1학기중 반쯤 가면 학생의 절반이 대학을 포기하고 만다. 더이상 공부해도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교측은 사실상 이들 대학포기자들에 대해 별다른 대책을 갖고있지 못하다. 능력차와 적성을 인정하지 않는 획일화된 입시위주의 교육과정에서는 공부 잘하는 소수의 학생이 주된 교육대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다.
교육개발원 임연기 선임연구원이 90년 10월 전국의 일반계 고교생 1천8백명과 교사 1천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는 획일화에 따른 소외현상을 잘 보여준다. 교과별로 수업을 이해하는 수준에 대한 학생의 반응을 분석한 결과,이해수준이 50%이하인 학생의 비율이 국어 39.8%,영어 69.1%,수학 69.8%,과학 68.8%,사회 42.7%로 밝혀져 실제로 수업을 따라가는 학생은 일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같은 입시위주의 획일화의 문제는 학교에서는 보충·자율학습,비입시과목의 축소,교과진도의 속성화를,학생에게는 과열과외라는 또다른 교육적 병폐를 불러오는 악순환을 거듭하고 있으나 교육정책적 대책은 아직도 초보단계다.
그동안 5차에 걸친 교육과정의 개정에서는 시대적 필요와 여건의 변화에 따른 교육내용의 개정에 치중했을뿐 교육의 근본문제 해결에는 손이 미치지 못했었다는 것이 한명희 교수(동국대·교육학)의 지적이다.
○근본문제 손못대
한교수는 또 교육과정의 개정과정에서 교육의 다양성과 수월성 등의 방향을 설정하더라도 총론에 그칠뿐 그것을 실천하도록 각 교과의 성취목표·내용·교수·학습방안·평가원리 등으로 이어지지 못해온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95학년도부터 시행되는 제6차 교육과정에서는 고교의 경우 개설과목수를 현재의 46개에서 70개로 늘려 국가지정 필수과목수를 축소하고 학기당 이수과목수도 현재 19∼22개에서 12개정도로 축소하는등 교육과정의 다양화와 학습부담의 완화를 시도하고 있으나 그 효과가 의도대로 나타날지는 미지수다. 입시부담에다 교육여건이 뒷받침되지 못해 개정취지를 제대로 살리기 어려울 것이라는 일선학교의 반응이다.
서울사대부고 조규삼 교장은 『새 교육과정에서 도입된 교육과정 결정의 지방분권화란 것도 사실상 대부분 학생이나 학교의 선택이 아닌 시·도교육청의 필수과목 결정에 불과한 것』이라며 『교육과정의 혁신뿐 아니라 교실과 교사를 확충하는 등 기본적인 교육여건을 개선해야 교육방식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이덕영기자>
◎이수교과 결정권 지방·각학교에 부분 이양/함영곤 교육부 교육과정담당관(전문가 진단)
교육의 목표와 내용,방법,평가 등의 기준을 정하는 교육과정은 다음의 네가지 수준에서 조화롭게 만들어져야 바람직하다.
먼저 국가수준의 해답이 있어야 한다. 교육은 방대한 국가적 공익사업이다. 법률에 의거 교육사업을 수탁관리하고 있는 정부는 교육현장에서 이 해답을 작성하는데 필요한 기준이 될만한 해답을 공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다음에 지방수준의 해답이 있어야 한다. 교육현장과 보다 근접된 위치에서 교육의 지원·관리업무를 수행하고 있는 지방교육행정기관이 중앙과 학교를 연결하는 입장에서 이 해답을 마련해야 한다.
또 학생을 수용하여 실제로 교육을 운영하고 있는 학교에서 이 해답은 학습자에 적합하게 준비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교실 수업을 통해 학생의 학습을 직접 지도하고 있는 교사차원에서 최종적으로 이 해답은 가장 치밀하게,실효성있게 작성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네차원의 해답중 우리나라에서는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국가수준의 해답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관심의 주된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서 국가수준의 해답에 모든 것을 무리하게 포함시키려고 시도하였고,그 해답에 너무나 전면적으로 의존해온 경향이었다. 그리하여 교육과정은 「교육의 기준」으로서의 기능보다도 「교육 그자체」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다 보니 그 교육이 교육의 수요자,수혜자에게 적합하게 마련되기 보다는 교육의 공급자,시혜자의 입장에서 준비되는 경향으로 기울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교육과정의 위상별·수준별·미분화와 지나친 중앙집중화 현상은 교육의 획일화·경직화·폐쇄화를 초래했던 것이다.
이시대는 정보통신기술의 혁명,급속한 과학·기술의 발전과 산업·취업구조의 변혁,범세계적인 문화적 동시화현상이 빠른속도로 진전되고 있어 지식과 정보가 주요한 자원으로 등장하고,창조성과 아이디어의 치열한 국제경쟁이 가속화되고 있어 다양성과 수월성의 교육이 중요하다.
그래서 20세기의 마지막 단계에서 정부는 2000년을 대비하는 교육개혁의 일환으로 국가수준의 해답을 다시 작성하는 작업을 90년부터 5개년계획으로 추진하고 있다. 제6차 교육과정이 바로 그 작업이다.
이 새로운 해답의 준비에서는 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공통성과 다양성,공동체의 필요와 개인의 요구,교양교육과 직업교육 등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것이 중시된다. 그리고 도덕성과 창조성이 특히 강조된다.
특히 고등학교 교육의 경우,교육과정 개정사상 처음보는 지각변동이 일어난다. 우선 이수교과를 중앙에서 획일적으로 모두 결정했던 체제를 중앙·지방·학교로 나누는 분권형 체제로 개선하였다.
이것은 국민의 기본적 자질형성을 위한 교육의 핵심은 중앙에서 결정하여 공통성을 유지하되,대량·획일체제에서 소홀히된 개인의 적성·개성·능력·진로 등에 보다 접근된 결정은 학습자와 가까운 곳에서 적합하게 이루어질수 있는 길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다양성을 확보하려는 개혁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교육여건의 병행적 개선을 필요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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