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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베 약물파동 구동·서독 감정대립 기화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도핑(약물복용)테스트 조작혐의로 4년간 출장정지 처분을 받은 세계최고의 여자 육상스프린터 카트린크라베(22·독일)는 과연 혐의가 있는 것인가, 아니면 동독의 희생양인가.
세계육상계를 경악케 한 이 사건은 법원에까지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으며 이를 둘러싼 찬반양론으로 구동·서독인간에 첨예한 감정대립으로까지 번져 육상계는 몰론 독일전체가 벌집을 쑤셔놓은 듯 시끄럽다.
이처럼 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은 독일 육상연맹이 지나치게 서둘러 크라베를 4년간 출장 정지시키는 중징계를 내림으로써 가뜩이나 통독 후 위축돼있는 구 동독체육인의 반 서독인 감정을 자극하게된 것. 사실 통합 2년째를 맞고 있는 독일 육상계는 그 동안 서독주도의 파행운영으로 동독인들의 강한 반발을 사왔다. 그러던 차에 이 사건 처리과정에서 또 다시 독일 육상연맹이 선수보호차원보다는 오히려 이를 부추기는 인상이 짙자 불만이 터지게 된 것.
구 동독체육인들은 『이 같은 처사는 계획된 음모』라며 구 서독출신 체육인들에 대한 억눌렸던 감정을 공개적으로 표출하고 있다. 또 이와 함께 「크라베 구명운동」을 벌일 움직임마저 보이고 있어 이를 둘러싼 파문은 좀처럼 가시지 않을 것 같다.
현재 바르셀로나 올림픽출전 독일 대표팀 전지훈련캠프인 남아공의 케이프타운 근교 스티렌포스에서 훈련중인 크라베는 『약물복용이란 말도 안되며 나를 궁지로 몰아 매장시키려는 음흉한 계략』이라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한편 독일육상연맹의 이번 조치에 대해 법정싸움도 불사하겠다고 말했다.
지난해 동경세계 선수권대회에서 1백m·2백m를 석권, 「단거리여왕」으로 부상한 크라베는 1m78cm의 탄력 있고 아름다운 몸매로 프랑스의 한 잡지는 지난1월 그녀를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여성선수」로 선정하기도 했다. 세계스포츠계를 강타한 이번 「크라베 파문」은 지난달 24일 독일육상연맹의 주관으로 실시된 도핑테스트가 발단. 당시 남아공에서 훈련 중이던 크라베는 구 동독 같은 클럽소속인 동료 브로이어·뮐러 등과 함께 도핑테스트를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세 선수의 소변샘플이 똑같다는 판정이 나와 도핑테스트 조작설에 휘말리게 된 것. 당시검사를 진행한 만프레트 도니케교수는 『이는 한 선수가 자신의 소변을 나눠 제출했거나 세 명의 소변을 한데 섞은 게 틀림없다』는 검사결과를 발표했다.
이 같은 도핑테스트 조작은 국제육상연맹(IAAF)규정 제55항에 따라 약물복용과 같은 처벌을 받도록 명문화하고 있다.
이 같은 결과가 발표되자 독일육상연맹은 칼스루 실내육상대회에 크라베의 출전을 유보했다 다시 번복, 출전을 허용하는 등 부산을 떨었고 크라베측의 강한 반발에 따라 2차 테스트를 실시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에 따라 독일육상연맹은 긴급 징계위원회를 소집, 이들 세 선수에 대한 중징계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
그러나 크라베 측의 반발도 만만찮아 구 동독체육인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부당성을 제기하는 한편 구 서독 인에 의한 구 동독선수 탄압으로 몰아붙여 국민감정에 호소하고 나섰다.
이런 분위기 속에 IOC도 『크라베 사건은 독일내부 문제이며 대표로 선발되면 올림픽출전은 막을 수 없다』며 크라베측에 우호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 최근 TV여론조사에서도 8천 명중 54·5%가 『육상연맹이 경솔했으며 크라베의 결백을 믿고 있다』는 등 동정적이었다.
더욱이 이 싸움에 다국적. 기업들이 뛰어들고 있어 새 국면을 맞고있다.
독일육상연맹 공식스폰서인 「벤츠」 「IBM」에 맞서 크라베의 개인협찬사인 세계적인 스포츠용품 메이커 「나이키」가 소송비용부담을 약속하며 크라베 지원을 공식 표명하고 나선 것.
그러나 『누가 조작했든 간에 조작 사실이 명백히 드러난 이상 일단 내린 결정을 철회할 수 없다』고 명분론을 고집하는 독일육상연맹과 『결코 약물을 사용한 적이 없고 소변 샘플을 조작하지도 않았다』며 무혐의를 주장하는 크라베 간의 「약물전쟁」은 현재로선 결국 법정으로 옮겨가야 판가름나겠지만 이로 인해 입게될 독일인의 마음의 상처는 엄청나게 클 수밖에 없다는 게 지배적인 분위기다 <전종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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