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의톡톡히어로] 망각의 저주에 걸린 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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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기억에 남는 캐릭터, 기억에 남는 영웅이란 대부분 잘 형상화된 '개인'을 칭한다. 하지만 예외도 있다. 가이 가브리엘 케이의 '티가나'(이수경 옮김, 황금가지, 전 2권)가 바로 그런 예외에 속한다.

티가나는 강대한 마법사에 대항해 당당하게 싸웠으나 패배한 작은 나라의 이름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마법사는 패배자들에게 최악의 복수를 한다. 그 복수란 어찌 보면 단순하고 형식적인 것일 수도 있다. 마법사는 단지 저주를 걸었을 뿐이다. 티가나의 국민이 아닌 모든 사람들이 '티가나' 라는 단어를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만든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결전이 오기 전날 밤, 티가나의 지도자였던 왕자와 그를 섬기는 조각가는 다가오는 패배를 예감하며 대화를 나눈다. 우리는 비록 패배하겠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명예로운 패배를 기억해주겠지.

마법사의 저주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던 용감한 패배자들의 마지막 소망마저 짓밟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누구도 티가나를 기억할 수 없게 만든다. 그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만드는 저주로. 소설 '티가나'는 그렇게 이름을 빼앗기고 기억당할 권리를 짓밟힌 후손들이 조국의 정체성을 되찾기 위해 싸우는, 가상의 세계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시대극이다.

강산을 빼앗긴 나라가 재기하는 과정을 그릴 때, 한 명의 탁월한 영웅이 고통 받는 민중을 이끌고 복수와 승리를 향해 나가는 이야기를 흔히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그런 영웅은 등장하지 않는다. 티가나의 부흥을 위해 뛰어다니는 왕자 알레산, 복수를 위해 적의 첩이 된 디아노라 등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누구도 복수를 주도하는 '단 한 명의 영웅'은 아니다. 그들은 집단이다. 집단으로서 그들은 어떤 뛰어난 개인보다도 더 훌륭한 '영웅군상'의 모습이 된다. 그들을 묶어주고 생명을 불어넣어주는 가장 강렬한 캐릭터는, 패배하고 말살 당했으나 되살아나는 나라, 티가나 바로 그 자체다.

작가는 한국어판 서문에 '세계의 많은 독자들로부터 혹시 내 조국의 이야기를 쓰신 것입니까?'라는 질문을 받는다고 밝혔다. 그리고 판타지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런 범용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 역시도 티가나의 기억을 갖고 있다. 결코 말살되지 않는 끈질긴 저항과 슬픔의 기억으로 얼룩진 상징의 이름들. 어설프게 그려진 어떤 개인보다도 무생물의 '캐릭터'가 더 강한 불멸의 힘을 내뿜을 때도 있다. 그것은 한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이름을 둘러싼 시대의 많은 삶들이 압축된 키워드니까.

진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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