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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미 "우리 것 사가라" 기술지원 꺼려 박격포 시사 땐 잦은 실수로 기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6면

<25면에서 계속>
한 박사가 발명한 국산파이버(방탄모)도 우여곡절을 겪기는 마찬가지였다.
『쇠가 아닌 합성수지를 이용한 군용 방탄모는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개발했을 겁니다. 미국에서 실험한 결과 철모와 다름없는 방탄력을 갖추었다는 판정을 받았다는 정보가 들어왔어요. 우리나라에 팔 생각을 했는지 제품의 우수성을 잔뜩 자랑한 팸플릿도 우송돼 왔지요. 까짓 거 우리라고 못할게 뭐 있나 하는 오기가 생깁디다. 당초 번개사업에는 포함돼 있지 않은 과제여서 예산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남몰래 연구를 시작했지요.』

<3개월만에 시제품>
수지종류의 선택, 배합비율, 성형시의 압력·온도·시간 등이 도무지 주먹구구식으로는 할수 없는 고난도의 작업이었는데도 결국은 성공했다. 불과3개월 만이었다. 한 박사는『이론상으로는 1백만번 가량의 실험이 필요한데 천행인지 2천여 회만에 최적조건을 찾아냈다』며『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으로 내 돈 털어 가며 그런 작업을 시도했나 싶지만 아무튼 국방예산을 엄청나게 절약했다는 데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방탄모의 성능을 시험하는 낙하시험 기는 고철폐품을 이용해 단돈 5만원을 들여 제작했다. 오원철 수석이 이 소문을 듣고『한 박사, 이상한 거 하나 만들었다며? 시제품을 갖고 청대로 들어와』라고 지시를 내렸다.
『청와대 마당에서 오수석이 눈으로 직접 성능을 보자는 것이었어요. 건장한 경호실 직원 한 명이 큰 망치로 방탄모를 내리치는데 저게 파삭 깨지면 어떡하나 하고 가슴이 조마조마 하더군요. 망치가 떨어진 순간 맞은 곳이 움푹 들어갔어요. 그러나 잠시 후 파인 부분이 되살아나면서 원래의 둥근 모양으로 회복됐습니다. 물론 깨진 곳도 전혀 없었지요. 지프를 방탄모 위로 지나가게 해 보았지만 역시 멀쩡했어요. 오 수석과 주변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한 건 물론이지요.』
오 수석은 즉석에서 『앞으로 한달 내에 시제품 2백개를 만들어 내라. 돈은 얼마나 들겠나 고 물었고 한씨는 2백90만원을 요청, 응낙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 획기적인 제품이 전 군에 퍼지는 데는 그후 2∼3년이 더 걸려야 했다. 오원철씨의 말.
『당시 주한 미8군사령관도 이 소식을 듣고 놀라더군요. 시제품 30개를 요청하길래 주었지요. 미국에 갖고 들어가 실험해 보고는「한국에서 이런 걸다 만들어 냈는데 우리는 무엇하고 있었나」고 자기들끼리 자책도 했다고 해요. 일선 군부대에는 미군이 먼저 실용화했습니다. 우리가 왜 늦은 줄 아십니까. 가볍고 튼튼하니까 지휘관들은 좋아라고 쓰고 다녔는데 사병들한테는 지급이 되지 않았어요.「플래스틱 제품이라 겨울철 야전훈련 때 철모처럼 물을 데워 세수할 수 없고 쌀을 넣어 밥을 해먹을 수도 없어 사병에게는 불편하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였습니다.』

<방아쇠 실매 격발>
사업 하나 하나가 가시밭길이었다. 미국이 해외 군원정책을『우리 것 사다 써라. 공짜는 이제 안 된다(BUY AMERICAN)』는 방침으로 전환한 시점이었고, 기술제공에 차츰 인색해진 때여서 일선 지휘관 사이에서도『달걀로 바위를 치느니 미국 무기를 도입하는 게 긴 안목으로 보아도 낫다』는 자포자기 식 인식이 많았다. 이 때문에 한 연구자는『사면초가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국내 관계자들의 몰이해와 미국 측 의견제가 심했다. 연구할 정력의 절반이상이 이런 가외의 문제들로 고민하는데 낭비된 느낌이다』고 까지 회상하고 있다.
소총을 만들어 시험사격을 해보면 몇십 발 못 쏘고 총열이 갈라지거나 휘었다. 시사 때는 약실이 터질지 몰라 거총 상태에서 방아쇠에 가는 실을 매어 멀리서 잡아당겨 격발 하곤 했다. 연구팀은 이를 농반진반으로「리모트컨트롤(원격조종)장치」라고 불렀다. 국산방독면도 이때 제작에 착수 됐는데 기존의 미제가 동양인의 얼굴에 맞지 않았고 화생방전에 대비해야 하는 필요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얼추 만들어 놓으면 안면 어느 부위인가에 꼭 허술한 틈이 생겼고 그 틈을 없애자니 얼굴이 아플 정도로 너무 꼭 끼어 애를 먹었다. 시제품을 쓰고 실험을 하려하면 다들 겁을 내고 피해버려 할 수 없이 방독면 담당과학자 자신이 사기가 개발한 제품을 뒤집어쓰고 실험을 해 보여야 했다.
60㎜박격포는 이모씨(작고)가 담당이었다. 다른 총포류와 마찬가지로 포신의 내경을 깎고 다듬는데 무진 애를 들여야했다. 시험발사를 하는데 포탄이 바로 근처에 떨어지기도 하고 한참 떨어진 각도로 날아가 버리곤 해 낙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중부산간지방에서 실험을 했는데 한번은 엉뚱하게 먼 민간인마을까지 날아가 떨어졌으나 기적적으로 불발이 되었고 또 한번은 기술진의 코앞 논바닥에서 터져 혼비백산한 적도 있었다.
군용지프를 시험할 때는 기어코 사고가 나 세 명이 숨졌다고 당시 곁에서 지켜보았던 한 관계자가 전했다. 지프는 야지에서 8만㎞이상의 주행시험을 거쳐야 합격품으로 인정받게돼 있었다. 연구팀은 중부지방시험장에서 주행실험을 강행해 7개월만에 8만㎞를 달렸다. 운전자는 안전 벨트를 매고도 거친 들판을 3백㎞가량 달린 뒤에는 내장이 울린다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러면 다른 운전자로 교체해 계속 액셀러레이터를 밟게 했다.

<군용지프도 국산화>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군이 6·25뒤 물려주었던 9종류의 군용지프는 표준화된 국산차량, 그것도 90%라는 놀라운 국산화 율을 기록하면서 70년대 후반께 국군에 보급되는 길이 열리게 됐다.
한 과학자는 회고한다.
『지금 젊은 세대가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죽자 사자 일했어요. 요즘 우리 방위산업은 미사일부터 여군속옷까지 못 만드는 게 없지 않습니까. 격세지감이 들면서도 우리가 그 초석을 놓았구나 생각하면 솔직히 대견해지는 게 사실입니다. <노재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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