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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판에 기적 같은 역전극|"국내용" 불명예 씻고 우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이창호5단이 세계정상에 우뚝섰다. 응창기배 및 후지쓰배와 함께 3대 세계기전 중의 하나인「동양증권배 세계프로바둑선수권 전」에서 난적 임해봉9단을 3대2로 꺾고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미 보도된 대로다.
이창호는 이번 세계제패로「국내용」이라는 불명예스러운 꼬리표를 떼어버리게 되어 더욱 감격스러울 법도 하다.
국내에서는 제1인자의 자리에 올랐으면서도 국제무대에서는 지금까지 이렇다할 성격을 올린 적이 한번도 없어 그 징크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쳐 왔던 것이 사실이다.
좌우간 이창호의 세계타이틀 획득은 국내용에서 탈피, 앞으로 세계무대마저 석권할 것을 예고하는 하나의 서곡인 셈이다.
이창호 자신도 응창기배와 후지쓰배에서도 우승하기 위해 부족한 포석감각을 다듬고 공격력을 기르는데 힘쓰겠다고 포부를 밝히고 있다.
또한 이창호의 영광으로 한국기단은 서훈현의 응창기배 우승이후 약4년만에 또 하나의 쾌거를 낚아 올린 것. 한바탕 바둑 붐이 일어날 전망이다.
이창호·임해봉 두「큰 바둑」이 엮어낸 다섯 판의 명승부를 돌이켜 보면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일진일퇴의 시소게임이었다. 5번 승부는 제1, 3국이 중요한 법인데 우리의 이창호는 그 1, 3국을 내주고 막판에 몰렸다가 기적과 같은 역전승을 일구어냄으로써 더욱 극적이었다. 그런데 다섯 판 모두 우세했던 폭이 역전패를 당하는 진기록이 이루어져 화제다. 큰 승부에 명국 없음인가.
흑자는『이창호가 운이 좋았다』고 했으나 오송생9단은『아니다. 그것은 실력이다. 실력이 없으면 결코 찬스를 살릴 수 없다』고 반박했다.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임해봉은 훌륭했다. 시합이 끝난 직후의 기자회견 석상에서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고『이창호는 이미 나의 수준을 앞서고 있다. 그는 다시 싸워보고 싶은 삼대다. 그런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답변하는 등 빈틈없는 매너여서 참석자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패자도 이러했지만 승자도 전혀 흥분된 모습이 아니었다. 세계정상에 올라 5천만 원의 상금을 거머쥔 사람답지 않게 담담하기만 했으니 두 사람의 그러한 태도는 살벌해져 가는 요즘 세태에 귀감이 될만하다. 승고흔연 패역가희(이겨도 그 기쁨을 곁으로 드러내지 않고 져도 또한 웃는 여유를 가진다)라는 소동파의 시구가 문뜩 떠오르는 정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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