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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정부가 인권의지 밝힐때(사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서울 민사지법은 30일 전민청련의장 김근태씨가 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 대해 원고승소판결을 내림으로써 최근 사법부내에서 높아지고 있는 인권보호의식을 재차 확인시켜 주었다. 아울러 이번 판결은 공권력에 의한 가혹행위에 대해서는 국가가 그 형사적 책임은 물론 민사적 책임도 져야한다고 함으로써 국가책임의 범위를 확대해 주었다.
우리는 최근 사법부가 인권 및 국민의 기본권과 관련된 소송들에서 잇따라 상식과 법리에 맞는 합리적인 판결들을 내림으로써 사법부 본래의 위상을 회복하고 국민의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데 크게 고무받는다.
「구속피의자의 접견권은 수사필요 등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될 수 없다」는 지난 90년 2월의 대법원판결,고법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던 강민창 전치안본부장등 박종철군 고문사건 피고인들에 대한 대법원의 원심파기(91년 12월27일),임의동행 형식으로 82시간이나 구금하고도 무혐의 불기소처분되었던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원심파기(91년 12월18일),변호인의 접견권에 대한 지난 28일의 헌법재판소 결정 등이 바로 그것들이다.
이처럼 최근 사법부안에는 과거와는 분명히 구별지을 수 있는 기류가 형성되어가고 있음은 충분히 감지할 수 있으나 과거로부터 벗어났다고 보기에는 아직 이르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도 당연한 판결과 결정이 대법원과 헌법재판소에 이르러서야 내려지고 있는 것에서 사법부가 전반적으로 아직도 옛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민사지법의 판결만해도 피의자의 접견권 부분에서는 바로 이틀전의 헌법재판소 결정과는 배치되게 검찰의 불법행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법부가 앞으로 개최할 예정인 법관세미나 등을 통해 이러한 판결상의 혼선을 조정하여 시대의 요구에 맞는 일관된 원칙을 확립해줄 것을 촉구한다. 인권 및 기본권에 대한 서로 다른 판결을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보아 넘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권 및 국민의 기본권보장이 사법부의 각성과 노력만으로 달성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사법부는 그 마지노선일 뿐 실은 정부와 입법부에 더 큰 책임이 있다. 말로는 민주화를 추진한다 하면서 왜 수사기관들에서의 가혹행위가 별 두려움도,죄의식도 없이 끊임없이 자행되고 있는가.
그것은 정부에 그 근절의 의지가 없기 때문이다. 고문사실이 밝혀져도 뚜렷한 물증이 없음을 기화로 딱잘라 부인해버리거나 증거가 나타난다해도 형식적인 문책이나 하고 말기 때문에 근절이 안되는 것이다. 이근안의 잠적이야말로 정부의 자세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보기다.
입법부 역시 책임을 면할 길은 없다. 임의동행이란 이름의 사실상의 불법구금,이유없이 긴 경찰서에서의 유치기간등 수사편의만을 위해 인권을 침해하는 악법들이 허다한데도 입법부는 그것을 그대로 통과시켜 주었고 개정할 움직임도 보여주지 않고 있다.
우리는 최근 사법부의 인권 및 기본권보장에 대한 의지와 인식에 정부와 입법부도 함께 발맞추어 나갈 것을 촉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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