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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절령(1)-윤동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등장 인물>
강호(32세) 순분(30세) 상도(32세) 최씨(52세) 정여인(46세)

<때>
현대의 초봄.

<무대>
순분의 술집 안. 오전. 중앙의 난로를 중심으로 탁자 세 개가 빙 둘러있으며, 난로 위엔 주전자가 김을 뿜어내고 있다. 정면은 주방. 우측으로 커튼이 드리워진 곳이 방. 출입문은 좌측에 있다. 까치소리와 함께 막이 오르면 순분, 담배를 피워물고 방에서 나온다. 머리가 부스스하다.
순분:(귀를 기울인다)까치?(문쪽으로 가며)별일이네. 폐촌이 된 화절령에 까치소리라. 궂은 일만 연일 일어나는 이곳에 누가 소식전할 일이 있어서 이 엄동설한에 까치를 날려보냈을까?(내다보며) 멀리서도 아니고 우리 지붕에서?(난롯가로 오며) 혹시?(사이) 아냐. 그럴리가 없어. 이미 떠난 지 삼년이 된 상도씨가… 그래. 나를…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다는데, 이 탄광촌의 작부인 나를 데리러 올 리가 없지. 들리는 소문이 맞다면 벌써 나를 잊었겠지.(이때, 기침소리 들리며 최씨 들어온다. 막 갱에서 나온 듯한 차림이다)
최씨: 거참 이상하네 ? 웬 까치가 순분네 지붕 위를 뱅뱅 맴돌고 있지. 노처녀에게 좋은 일이 생길건가?
순분:(담배를 얼른 끄며)죄송해요. 번번이 조심한다고 하면서도 늘상 이러네요. 이제 일이 끝나셨나 보군요.
최씨:(손을 부비며) 추워. 삼월이면 저 남쪽에서는 눈 구경하기도 힘들다는데 이 화절령은 푸른 풀 구경하기도 힘드니, 원.
순분: 오늘은 꼬랑지가 없네요?
최씨: 꼬랑지 ?
순분: 매일 떨어지지 않고 달랑거리며 붙여 갖고 다니시더니 웬일이세요?
최씨: 아! 강호말인가? 역시! 노총각은 노처녀가 챙긴다고! 이거 샘 나는데.
순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매일 붙어 다니더니 오늘은 안보이니까 예의상 물어본 것이니까요. 달리 생각마세요.
최씨: 어? 그렇게 애써서 변명하지 않아도 되는데, 더 이상한데?
순분: 정말 이러실 거예욧!
최씨: 너무 정곡을 찔렀나? 하하하.(사이) 아냐. 아냐. 미안해.
순분: 근무시간이 달랐던 모양이죠 ?
최씨: 아냐. 우리가 달라질 수 있나. 이 화절령의 유일한 두 두더쥐가. 강호도 곧 올거야. 읍내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나갔어.
순분: 아저씨는요.
최씨: 이제야 일이 끝났어. 강호는 젊으니까 힘이 펄펄 끓어 넘치잖아. 무섭게 일하더구만. 무슨 볼일이 있는지.(앉으며) 그놈의 도깨비 같은 도급제도 젊은이한테는 힘을 못쓰나봐. 나 같은 늙은이만 잡고 늘어지니, 원.
순분:(주방으로 가며)도급젠지 도둑젠지는 참 끈질기기도 하네요. 일제 때에 생겼다는데 아직도 쌩쌩하게 살아있으니.
최씨: 어디 쉽게 버릴 수 있겠어. 관리자들이야 책상에 앉아 숫자계산이나 하는 게 일인데, 갱 속에 들어 올 일이 있어야지. 그러니 광부들이 일을 하나 안 하나 알 수가 없으니 도급제를 없앨 수 없다는 거야.
순분: 지독하구만요. 석탄산업 정린가 합리환가가 발표되면서 더욱 힘들어진 것 같아요.
최씨: 그려. 예전에는 업주들도 웬만하면 광부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더니만 이제는 배짱이야. 철저하게 도급제를 적용시켜. 허리가 부러질 것만 같애. 헌데도 봉급은 맨날 똑같애. 매년 오르긴 오르는데 봉투에는 거기서 거기야.(순분, 컵을 가지고 와 물을 따라준다)
순분: 그 정책이 있기 전에는 우리 집도 장사가 잘 됐는데. 이젠 벌어놓은 것마저 까먹고 있으니….
최씨:(물을 마신다)속이 확 풀어지는군. 안과 밖이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순분: 네?
최씨: 갱 속에선 찬물만 마셔. 여름이야, 여름. 그런데 갱속에서 나오는 순간부턴 겨울이야. 벗어놓았던 옷을 껴입지 않으면 금방 몸이 얼어버려….(떤다)
순분:(팔짱을 끼고 왔다갔다하며) 아저씨는 언제까지 머무르실 거예요?
최씨: 응? 뭐라고 했지?
순분: 곧 중공이나 시베리아에서 탄을 수입할거라던데. 수지가 맞겠어요? 살기가 더 힘들어질텐데….
최씨: 글쎄.
순분: 강호씨는 눈만 녹으면 서울로 가겠다고 하던데요. 요즘 서울은 하루 일당이 십만원씩 한다잖아요. 그것도 일할 사람이 없어서 난리래요.
최씨: 그런다더구만.
순분: 젊은 사람들이 힘든 일을 기피한대요. 그래서 노가다판이나 어디나 고령자가 많다던데요. 그나마도 일손이 부족하대요.
최씨: 농촌도 고령자, 탄광도 고령자, 노가다판도 고령자, 공장도 고령자… 도대체 젊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지?
순분: 어디서나 똑같대요. 서울에 있는 다방같은 데도 내 나이 또래면 젊은축에 낀대요.
최씨: 순분 나이가 어때서? 이제 서른살. 확 피어나는 요염함이 전신에 물씬 풍기는데….
순분:(눈을 흘긴다)아이, 아저씨는….
최씨:(사이)젊은 사람들 이야기지. 나야 이 나이에 서울로 가봤자 날품팔이밖에 더하겠어. 거기나 여기나 매한가지지 .
순분: 그래도 탄광보단 났지요. 위험도 덜하고. 사실탄광을 쳐다보면 오금이 저려요. 무너지지나 않을까. 저 새카만 가루를 마시면 폐가 버리지나 않을까?
최씨:(기침) 이미 버렸어. 가슴이 뻐개질 것만 같은걸. 광부들 치고 진폐증, 규폐증에 안걸린 사람이 어디 있어.
순분: 아저씬 삼십년째라고 했던가요?
최씨: 응.(생각)벌써 그렇게 됐구만. 참 나.(사이)꿈도 많았는데. 남같이 살고 성공하고 싶었는데…. 하지만 이 화절령의 생활. 후회는 안해. 뗘날 생각도 없고. 애들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갱속을 드나들어야지.
순분: 하지만 여기는 다르잖아요. 인근 부락은 큰 탄광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만 이 화절령은 이미 모든 탄광이 문을 닫았잖아요. 사람들도 다 떠나고 여남은 집만 남아있는데….
최씨:(말없이 물만 마신다)
순분: 난 눈이 녹는 게 두려워요. 매년 그랬잖아요. 눈이 녹고 언덕이 푸릇푸릇 해지면 이삿짐을 인 동네 사람들이 눈물을 떨구며 떠나갔잖아요.(앉는다) 올 봄엔 또 누가….
최씨: 자신 이야기를 하는 것 같구만.
순분: 네?
최씨: 아냐. 아냐.(밖을 보며) 이 사람은 왜 이리 늦지?
순분: 무슨 일이 있대요?
최씨: 글쎄. 잘 모르겠어. 요즘 들어 얼굴이 흐렸다가 개였다가 하는 것 같던데.(사이) 정말이야?
순분: 넷?
최씨: 그 말 말이야?
순분: 뭐가요 ?
최씨: 강호가 떠나겠다고 한 말.
순분: 아, 슬쩍 비추더군요.
최씨: 순분이도 함께?
순분: 네.(했다가 얼른 고갤 떨구며)그러자고 하지만… 저는….
최씨: 상도 때문인가?
순분:(말없이 바닥만 바라본다)
최씨: 약속한 것도 아니잖어. 그리고 올 사람 같았으면 벌써 왔지. 편지 한 장도 없고. 서울엔 어여쁘고 늘씬한… 하긴 순분이도 늘씬하고 예쁘지만…하여튼 서울여자들에게 한번 혹하면 빠져나 올 수 없다던데. 그리고 그 녀석은 혼자 간 것도 아니잖어. 보라다방….
순분: 기다리지 않아요! 다만…저도 여기서 술을 파나 어디서 술을 파나 똑같아서 가지 않는 것뿐이지.
최씨: 그려. 남은 사람들이사 사연이 질긴 사람들이지. 세상사 쓰디쓴 맛 다 맛 본 사람들이지. 그래서 이야긴데…(다가앉으며)강호 어때? 성실하고 생활력 강하고, 흠이 있다면 우직하다는 것이지만 오히려 그게 장점이 될 수도 있잖아?
순분: 또, 왜 이러세요?
최씨: 싫지는 않지? 따지고 보면 상도보다 강호가 훨씬 낫지. 암. 인물만 좀 빠졌다 뿐이지 다른 것은 상도보다 훨씬 낫지. 안 그래?
순분: 그렇긴…해요.
최씨:(심한 기침)물로는 안 될 모양이여. 지독한 탄가루! 꼭 막걸리가 들어가야 씻겨져 내려가니…(기침)
순분: 잠깐만 기다리세요.
최씨: 안주는 없어도 돼. 이 눈길에 안줏거리 장만인들 제대로 하겠어?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순분, 주방으로 간다)
순분: 간간이 읍내에 나갔다 왔구만요. 답답도 하고 그래서. 어떡할까요? 얼큰한 콩나물국 끓일까요?
최씨: 그려. 말만 들어도 군침이 도는구만.(하는데 문이 열리며 강호 들어온다)
순분:(얼른 돌아보며 설핏 웃음)당신도 양반되긴 틀렸네요.
강호: 왜? 내 욕하고 있었는감 ?
순분: 지독하게 싸잡아 욕했지요.
강호: 뭐여? 어쩐지 재채기가 자꾸 나오더라니.
최씨: 나는 눈에도 안 들어오지? 역시 처녀 총각 있는데는 끼는 게 아니라니까.
강호: 아저씨도 참.
순분: 그런데 뭐 하러 앉아 계세요? 가시지.
최씨: 어? 정말이야?
순분: 비싼 밥 먹고 거짓말 할까봐. 호호.
최씨:(일어나며)그럼 나감세. 잘들 해 보라구.
강호:(붙잡는다) 아저씨도 참. 농담한걸 가지고….(분이에게 눈짓) 앉으세요.
최씨: 싫어. 괜히 순분에게 눈총 받기 싫구만.
순분:(나오며)눈총이 아니라 딱총을 맞더라도 앉아 계세요. 아저씨가 늑대에게서 저를 보호하셔야죠.
강호: 뭐? 그럼 내가 늑대란 말야?
순분: 호호.(사이) 흥 !
최씨: 정말! 내가 없으면 안되겠구만.(앉는다) 험. 순분인 안심 턱 놓고 어여 국이나 끓이라구. 늑대의 이빨은 내가!(하면서 강호 허리춤을 잡아 앉힌다)내가 없앨 테니까.
순분 :호호호. 제발 그래주세요.(주방으로 가는 순분)
강호: 아저씨 ! (눈을 찔끔찔끔)이 손 좀….
최씨: 자내 눈에 티 들어갔나? 왜 그리 끔적거려?
순분: 호호.
강호: 혁대 끊어지겠어요!
최씨: 안돼야. 여길 놓았다간 난 순분에게 딱총 맞게돼.
강호: 아저씨! 그럼 저에게 눈총 받는 건 괜찮고요? 매일 막장을 드나들며 같이 일하는데….실수한 척 하고 탄 속에 콱!
최씨: 어? 그럼 난 어떡해야지?
순분; 호호. 강호씨 이빨이야 이미 힘을 잃었는걸요. 제가 알아요. 그러니 해방시켜주세요.
최씨: 그럴까?(놓으며) 본심이 아니었네. 하하하.
강호: 하하하!
순분: 호호호!
최씨: 좋구만. 정말 오랜만에 이 술집이 웃음보를 터뜨리는구만. 정말 좋아. 좋아.(갑자기 시무룩해진다) 모두 가면… 이제 여기는….
강호: 아저씨….
순분: 저는 가지 않고 아저씨 말동무 할테니 걱정마세요.
강호: 순분 ?
최씨: 아녀. 순분인 여기 있어선 안돼. 젊은 여자가 혼자서 이 산구석에서 무얼 하겠다는 거야? 임따라 뽕따러 가야지.
강호: 그렇죠 !
최씨: 내내 그 이야기하고 있었구만. 섭섭해도 난 보내줄거여. 이제까지는 이사하는 사람들을 울면서 보냈지만 이젠 달라. 웃으면서 보낼 거여.
강호:(순분에게) 그럼?
최씨: 결정했네.
강호: 네?
최씨: 자네하고 평생을 같이 하기로! 정말 어울리는 한쌍이야.
강호: 아저씨도 아시고 계셨군요? (순분에게) 비밀로 해 달라니까.
순분: 숨길 걸 숨겨야지 몇집 남은 이웃이라고 비밀을 가져?(사이) 그러고 내 상관할 반 아니지만 강호씨도 성격을 고쳐. 항상 비밀, 비밀! 나중에 창피 당하면 어떡하나! 그래가지 고선 무슨 결혼을 한다고… 결혼은커녕 연애도 못하겠다!
강호: 헛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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