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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 국내 언론 최초로 CHANEL 공방에 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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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파리=강승민 기자, 사진 제공=샤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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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인의 예술, 브랜드를 입다

이달 초 파리 시내의 자수 공방 '르사주'. 1858년 문을 연 공방은 시내 중심가의 작은 골목 안쪽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공방 곳곳에는 '과거의 기억'이 배어 있었다. 공방 구석의 자료실, 100여 개의 누런 옷 상자가 눈에 띄었다. 그중에는 1930년대의 전설적인 디자이너 엘자 스키아파렐리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시퀸(주로 여성용 옷에 장식으로 쓰이는 작은 금속 조각. 아주 작은 단추처럼 생긴 것을 실로 엮어 장식한다)이 수놓인 천도 보관돼 있었다.

프랑수아 르사주

150년째 공방의 전통을 잇고 있는 프랑수아 르사주(76)는 "함께 작업하는 샤넬의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도 예전의 자료에 관심이 많다"며 "100년 전, 50년 전 작품을 보면 또 다른 영감을 얻을 수 있다"고 자랑했다.

자수 공방 르사주는 96년 특별한 자수를 선보였다. 봄.여름 오트 쿠튀르(맞춤복) 컬렉션을 위해 만들어진 드레스에 쓰인 것이다. 금색의 긴 줄과 장식용 금실이 특징인 이 드레스에 르사주에서는 1200시간을 들여 수를 놓았다. 명품은 시간의 산물이라는 점을 각인할 수 있었다.

프랑수아 르사주도 같은 얘기를 했다. "비법? 특별히 숨길 것도 없고…, 정말 우리한테 특별한 비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크로셰(자수 뜨개질을 하는 끝이 구부러진 코바늘 도구)를 사용하는 우리 기술이 특별한 건 아니다. 오랜 전통과 샤넬이란 브랜드가 만나면서 가치가 높아졌다. 세계적 디자이너와 함께 작업하면서 창의성도 배가됐다"고 설명했다. 공방에서는 루이뷔통, 크리스티앙 라크르와 등 다른 브랜드의 자수 작품도 만들고 있었다.

레이먼드 마사로

구두를 만드는 공방 '마사로'에도 전통과 예술이 함께 숨 쉬고 있었다. 겉으로는 파리 시내의 평범한 구두 가게처럼 보이지만 전 세계 고객 3000여 명이 구두를 주문하는 유명한 곳이다. 1894년 문을 열어 103년째 같은 자리에서 영업하고 있다. 공방에는 이곳에서 구두를 맞춘 고객 하나하나의 발을 본뜬 나무 본(本) 1만여 개가 보관돼 있다.

레이먼드 마사로(79)는 "고객이 원하는 어떤 모양의 구두든 만들어 줄 수 있다"며 장인의 자신감을 표시했다. 그는 "한국인 고객도 다수 있다"며 "구두 한 켤레에 최소 3000유로(약 375만원) 정도 한다. 그러나 최고가는 없다"고 말했다.

그는 "손님이 원하는 소재와 모양, 거기에 들어가는 우리의 노력이 곧 가격"이라며 대단한 자부심을 보였다. 이런 자부심은 발모형을 깎는 젊은 장인에게도 찾을 수 있었다. 그 젊은 기술자는 "나 역시 보조가 아닌 정식 보티에"라고 강조했다. 프랑스에서는 구두 만드는 장인을 '보티에'라고 한다. 일반 제화공 '쇼쉬르'와 구별되는 명칭이다.

# 전통 예술도 현대와 결합해야

마사로의 고객은 다양하다. 그는 "샤넬 브랜드로 팔리는 구두를 만들면서도 할리우드 스타를 비롯한 전 세계의 수많은 고객에게 '마사로' 브랜드 구두도 직접 판매한다"며 "2005년 선종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도 우리 고객이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고객들이 있어서 예술적 전통을 가진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자수 장인 르사주 역시 "샤넬의 글로벌 최고경영자(CEO)인 프랑수아즈 몽트네가 '공예도 산업화돼야 한다'고 한 말에 동의해 15년 전 샤넬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예술적 전통을 살려 가기 위해선 샤넬 같은 명품 브랜드가 필수적이다' '장인의 혼이 깃든 예술을 보존하기 위해선 시장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에 공감이 갔다. 실제 르사주에는 수십 명의 자수 장인이 한땀 한땀 크로셰로 몇 시간씩 화려한 장식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자수의 가격은 이들이 일한 시간에 비례해 높아진다. 장인들의 보수가 일반 근로자보다 높은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르사주는 "프랑스의 전통이 깃든 자수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하는 것이 내 작업"이라며 "지난해 한국을 방문해 한복에 쓰인 자수의 아름다움도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향수 향이 옷에 스미듯 현대가 전통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명품이 탄생한다"는 비법 아닌 비법을 재차 강조했다.

프랑스는 1994년부터 '메트르 다르'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거장(巨匠)'으로 번역할 수 있는 이 제도는 도예가, 인쇄 전문가, 유리 공예가, 부채 만드는 사람, 모자 제작자 등 대상도 다양하다.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와 비슷한 개념이다. 메트르 다르가 되려면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성뿐만 아니라 관련 기술을 전수하는 교육적 자질까지 인정받아야 한다. 르사주 역시 자신의 공방에 자수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 장인들의 상품가치를 결정적으로 높인 건 샤넬 브랜드다. 샤넬은 자국의 공예전통에 자신의 브랜드 파워를 결합해 또 다른 명품을 빚어내고 있다. 전통이란 문화와 브랜드란 상업성을 제대로 접목한 셈이다.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대적.상업적 계승에는 부진한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를 진작하는 '방책'으로 원용할 만하다.

프랑스의 모든 장인이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은 아니다. 르사주는 "커튼 묶는 매듭을 만드는 '파스망티에'는 사라졌다. 장인의 머릿속에 모든 게 있었는데 그가 죽고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마사로 또한 "일을 물려받을 아들이 없어 지금 후계자를 물색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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