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대통령 이미지 만드는 언론참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7면

통상 청와대 대변인이라고 불리는 대통령 공보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의 「입」구실을 하고 있다.
대통령의 의지는 대변인을 통해 국민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정부에는 정부 대변인이 따로 있다. 공보처장관(과거엔 문공부장관)이 정부대변인이다. 대통령중심제 국가에서 정부 대변인·청와대 대변인의 기능은 자칫 중복될 수도 있다. 때문에 양자간에는 항상 미묘한 긴장이 있다.
대통령 업무의 홍보나 언론조정은 통치의 중요 기능의 하나다.
정무수석 비서관이 홍보업무를 장악하게 되면 대변인의 기능은 축소된다. 그 반대로 대변인이 홍보조정업무에 간여하게 되면 그 권한이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확대된다.
대통령에게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는 우리의 권력체제에서 청와대 대변인의 역할은 대통령과의 관계, 비서실내의 역학관계, 그리고 정부와의 관계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이다.
대변인의 가장 큰 일은 물론 대통령 행사를 언론에 알리고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을 만드는 일이다. 때문에 역대 대변인 중에는 당대에 필명을 날린 문장가들이 끼여있다.
황선필·최재욱씨 등은 문재가 널리 알려진 인물이고 이수정전대변인은 『우리는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기수가 되련다』는 서울대 문리대의 유명한 4·19선언문을 쓴 장본인이다.
임방현씨도 한국일보 논설위원으로 필명을 날렸고 이번에 임명된 김학준대변인은 정력적인 다작의 문장가다.
이들은 자신들의 글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필재보다 정치적 이유로 발탁된 몇몇 대변인은 그 휘하 공보비서실에 필력 있는 비서관들을 끌어 모은다. 해서 공보비서실은 어떻든 문사들이 재능을 발휘하는 곳인 셈이다.
선진 외국의 경우 대통령이나 총리의 대변인은 언론에 대한 정기적 브리핑을 하고 신문기자들과 입씨름을 벌여야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의 경우 그 부담이 좀 가볍다. 청와대의 브리핑이란게 없다시피 하고 아직 권위주의의 잔재가 남아 있어 대통령에 대한 취재·보도가 조심스럽기 때문이다.
담화문을 많이 발표하기로 유명했던 이승만대통령의 경우 자신이 문안을 구술, 받아쓰도록하고 이를 정서 시킨 뒤 「만」 자 사인을 해 발표토록 하는 게 대체적 과정이었다.
이대통령 스타일 아래에서 공보담당자의 임무는 아주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극히 예외적 경우다.
박정희·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은 꼭 포함시킬 부분을 적시, 문안을 작성토록 했다.
진두지휘형인 전대통령은 주문사항이 많았고 그 자신 상당한 문장력이 있었던 박대통령은 메모를 직접 내려보내기도 했다. 노대통령은 취임 초부터 이수정대변인에게 몇 가지 사항만 지시하고는 수정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이대변인이 3년8개월 여 잠수한 것은 이대변인의 글이 노대통령의 취향에 맞았고 서로 호흡이 맞았기 때문.
너무 빈번한 인사를 했다는 말을 듣는 노대통령이 대변인을 그토록 오래 둔 것은 드문 경우. 전대통령은 7년 임기중 5명의 대변인을 갈아치웠는데 전대통령 재임기간 중 황선필대변인이 3년8개월로 장수했고 그 뒤 정구호·이종률·최재욱 대변인은 1년을 채우지 못했다.
대통령의 연설문 작성이대변인의 주된 임무지만 때로는 그 이상의 기능, 즉 정치 자문역이 되거나 인사·주요정책에 의견을 개진하는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박대통령의 3공 시절 김성진 대변인이 유신으로 가뜩이나 위축된 당시 언론계를 틀어잡은 것은 홍보관계를 대변인이 장악했기 때문.
4공의 서기원대변인은 최규하대통령에 대한 정치적 조언자로서 유력한 참모장 역할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신범직·김성진대변인도 박대통령의 주요사안에 대한 자문에 응하는 사례가 많았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의 경우 인사문제에 관해서는 사정수석 등 다른 참모조직을 활용했다.
의전수석 다음으로 대통령과의 면담이 많은 대변인은 청와대 비서실 내부의 역학관계에서 미묘한 입장이 되기 쉽다. 정부, 특히 업무상 중복이 될 수 있는 정부대변인인 공보처장관(문공장관)과는 협력자이자 경쟁자로서의 미묘한 관계에 있는 것도 때로는 큰 부담으로 작용한다.
청와대 대변인은 차관급으로 정부 대변인인 문공장관(현 공보처장관) 보다 한 수 아래고 청와대 대변인을 역임한 뒤 문공장관으로 영전하는 사례가 적지 않아 서열은 분명하지만 최고통수권자와의 접촉 빈도·원근이 힘의 우열을 결정짓는 정치문화속에서 은연중 긴장이 흐르게돼 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문공장관이 내각에서 설치는(?) 경우 대변인의 기세는 대개 축소되고, 거꾸로 그 반대의 경우가 되면 문공부가 위축된다.
5공 시절 이진희문공장관과 황선필 대변인이 비슷한 시기에 두 자리를 맡으면서 몇몇 국책언론사에 대해서는 편집·보도국 부차장급 인사는 물론 일부 기자들의 출입처 배정에까지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후문이다.
5공시절 전대통령의 사소한 동정까지를 톱 뉴스로 다루게 해 「땡 전뉴스」(9시 시보가 울리자마자 전두환대통령 뉴스를 보도한 것을 비유)라는 비아냥이 나왔고 KAL기 격추사건으로 세계가 떠들썩할 때 전대통령의 새마을 청소장면을 장시간 우선 방영했던 난센스가 빚어진 것도 그같은 언론규제 때문이었다.
청와대 대변인이 자주 교체된 86년을 고비로 청와대의 언론에 대한 직접적 장악기도는 많이 사그라 들었고 6·29는 더욱 줄었다.
3공 시절 언론탄압이 극성을 부리던 때에 전 언론이 청와대 대변인의 거취에 주목해야했던데 비하면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시대상황과 집권자의 통치스타일, 그리고 대변인 개성에 따라 대변인의 역할은 그처럼 천차만별이다.
오늘날과 같은 공보수석비서관경 대변인 제도가 성립한 것은 63년 12월 박정희대통령의 3공화국이 출범하면서부터다.
박대통령 이전의 경무대시절에는 요즘과 같은 비서실조직은 없었다.
이대통령 비서실은 직위구분이 없었으며 잔심부름이나 하는 개인비서들이 직급없이 주어진 업무를 담당했다.
건국 초기에는 그저 동일업무를 반복함에 따라 박용만정무·김광섭공보·이종훈서무·김석진문서 등으로 업무 분장이 이뤄졌고 김강천·김종희·황규면·오일육씨 등의 비서들이 그때그때 맡겨지는 일을 처리했다. 내각책임제였던 윤보선대통령의 2공화국 때는 이재항 비서실장을 포함, 비서관은 5명이 고작. 이중 국방업무를 담당한 김남 비서 외에는 모두 공보관계자로 김준하씨가 대변인을 맡았었다.
이렇게 빈약했던 대통령비서실은 3공 출범과 함께 대폭 강화됐다. 이후락실장 밑에 정무·민원·공보·의전·총무 등 5개 비서실이 구성됐다. 대통령 비서실의 기능별 업무담당이 처음 구분 지어졌고 공보가 하나의 기능으로 정착했다.
수석비서관의 직급은 경제까지를 총괄하는 정무수석이 차관급이고 의전수석만 1급이었을뿐 나머지는 2급직으로 보임됐다.
대통령 비서실이 이렇게 제대로 틀이 잡혀진 이후의 공보수석은 박상길씨다.
자유당중앙위원·4대 민의원·공화당중앙상무의원을 지내고 2급직 공보수석경대변인이 됐던 박씨는 1년만에 2계급을 승진, 총무처차관으로 나갔다. 당시 비서실장이 능수 능란한 이후락씨였기 때문에 다른 비서의 기능은 그야말로 실무보좌에 그쳤다.
박대변인도 실무에 한정됐고 주요 언론정책은 이실장이 전담했다는 얘기다. 이후현재의 김학준대변인에 이르기까지 명이 이 자리를 거쳐갔는데 그 직급·임기 등은 제각기 다르나 대부분이 언론계 출신이라는 게 공통점. 정치인 출신의 박대변인 이후 윤주영·김성진·임방현·서기원·이웅희·황선필·정구호·이종률·최재욱·이수정·김학준대변인 등 11명이 언론계 출신이다.
신범직대변인도 공화당대변인 이전 논설위원을 한바있으므로 언론계 범주에 포함될 수 있는데 따라서 비언론계로는 군출신인 강상욱대변인 1명 정도.
또 언론계 출신이라지만 언론계에서 막바로 청와대대변인이 된 경우는 이웅희·정구호 대변인 두 사람 뿐이다.
나머지는 거의 공직이나 정부에서 언론관계일 등을 하다 대변인으로 발탁됐다.
윤주영대변인은 대변인이 되기 전 이미 무임소장관까지 역임했고 김성진대변인은 청와대에 들어가 1급 공보비서관·부대변인을 지냈다.
또 임방현대변인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을, 서기원대변인은 경제기획원 대변인·총리공보 비서관을, 황선필대변인은 문공부 보도국장·공보국장·총리공보비서관을, 이종률대변인은 유정회의원·12대 전국구의원을, 최재욱대변인은 대통령 공보비서관·경향신문사장을, 이수정대변인은 해외공보관·청와대 정무비서관·MBC전무를 지냈다.
김학준현대변인도 대학교수·국회의원(12대 전국구)·대통령 사회담당 보좌관을 거쳤다.
2급직으로 시작된 대변인자리는 한때 장관급 자리로까지 격상된 적이 있는데 이후 차관급으로 고정됐다.
정무직인 청와대 대변인자리는 당연히 임기가 없으며 대통령과의 호흡, 정부인사 등 당시 여건에 따라 달라지는데 최장수는 4년5개월의 김성진대변인(대변인 공석기간 부대변인 재임 3개월 포함).
3년10개월의 신범직·이수정대변인, 3년8개월의 황선필대변인도 장수케이스.
최단명은 윤주영대변인으로 6개월이며 최재욱 7개월, 서기원 8개월 등이다.
대변인 재직기간과 권한행사의 강도는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최장수의 김성진대변인을 비롯, 신범식·황선필대변인이 끗발있는 대변인이었던 것은 사실.
신대변인은 이후락실장의 서슬 속에서도 박대통령의 각별한 신임을 받아가며 중요정책·인선에 관여했는데 후일 윤필용사건에 관련이 돼 여러가지로 말이 많았다.
김성진씨는 최장수 대변인을 지낸 뒤 만4년 동안 문공장관까지 거치면서 유신기간 중 내내 언론에 군림했다. 때문에 그의 문공장관 재임기간 중 청와대 대변인을 맡았던 임방현대변인은 실무대변인 역할만 했다.
5공 때는 대변인의 기능이 들쭉 날쭉이었지만 정무수석실과 홍보조정업무를 나눠 맡아 그 전보다 축소됐다.
그러나 여전히 언론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게 사실. 6공이 들어서면서 대변인의 기능은 연설문 작성으로 한정되다시피 했다.
이수정대변인의 경우 노대통령의 신임에도 불구, 본래의 임무에만 충실해 스스로의 역할을 확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히려 공보비서실에서는 옛날 같은 파워가 없어졌다고 불평했고 정무비서실 등에서도 공보비서실이 나서 주기를 바랐지만 그는 자신의 영역 밖으로 나가는 법이 없었다.
5공이래 체제홍보팀이 정무수석 휘하에 별도 가동되고 있어 대변인의 기능은 그만큼 실무기능으로 한정돼있는 셈이다. 대변인의 기능이 마냥 화려한 것만은 아니고 수고로운 자리여서 대개 그 자리가 끝나면 문공장관이나 주요언론사 사장 자리를 보상받았다.
신범직·윤주영·김성진대변인은 문공장관으로, 이종률대변인은 정무1장관으로, 이수정대변인은 문화부장관으로 각각 입각했으며 강상욱·임방현·최재욱대변인은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이웅희대변인은 MBC사장을 거쳐 문공장관을 지냈고 그밖에 황선필대변인은 MBC사장, 정구호대변인은 KBS사장이 됐다.
그러나 최규하대통령의 핵심 참모였던 서기원대변인의 경우 최대통령이 대통령을 쫓기듯 물러가면서 전두환대통령에게 후사를 간청했으나 냉대 받았다. 신군부에 협력하지 않았다는 이유다.
최대통령은 서대변인·최광수 비서실장의 자리를 당부한바 있는데 5·17주도세력은 서대변인을 최대통령이 요청했던 그대로 행정개혁위원으로 보냈다가 행정위 마저 없애버려 그들 진영에 굽히지 않은 서대변인에 대해 앙갚음했다.
청와대 대변인은 권력과 언론사이를 잇는 창구다. 그러나 지난날 권위주의적 권력의 위세가 언론을 압박하던 시절 언론인 출신 대변인들이 홍보 조정이나 언론 협조라는 이름으로 언론규제의 선두에 섰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 기능이 크게 줄었지만 청와대 대변인이 주요정책을 정기 브리핑하고 기자들과 입씨름하는 날은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김현일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