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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과문화

한국영상자료원의 봄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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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전설적인 나운규의 '아리랑'이나 이규환의 '임자 없는 나룻배'와 같은 필름들이 유실된 상황에서 현재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필름은 36년의 '미몽'이다. '반도의 봄'도 다른 초기 기록 영상물들과 더불어 2005년에 비로소 재발견됐다. 사실 돌아보면 지난 몇 년간 영상자료원은 많은 일을 했다. 한국 영화사 연구자인 이효인 전임 원장과 직원들의 노력이 컸다. 부지런히 옛 필름들을 찾았고, 그것을 모아 상영회를 열었다. 또 강연회와 세미나도 열었다. kmdb라는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인터넷상에서의 검색도 용이하게 만들었다(www.koreafilm.or.kr를 방문해 평소에 관심 있는 영화나 영화인들을 검색해 보시라).

15년 전쯤 한국 고전영화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차마 믿을 수 없었던 일은 일제 강점기 때 영화들이 한 편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식민지배와 한국전쟁, 그리고 독재를 거치면서 문화유산이 전반적으로 소실된 것에도 이유가 있지만 영화를 현대의 문화유산으로 생각하지 못한 데도 원인이 있다.

그래서 2000년 무렵 모스크바의 키노 뮤제를 방문했을 때 40만 점이 넘는 영화 관련 자료에 경이감을 느꼈다. 물론 프랑스가 그 부분에선 더 앞서겠지만, 나를 감동시킨 것은 소련의 몰락 후 그곳을 지켜 내고 있는 나움 클레이만 소장의 영화 수집과 상영에 대한 열정과 헌신이었다. 그는 예이젠시테인에 박식한 학자이며, 러시아 영화만이 아니라 유럽 영화들을 상영하는 영화제들을 기획해 키노 뮤제를 시네필들의 낙원이자 모스크바의 명물로 지켜내고 있었다. 2004년 마피아들이 푸시킨스카야에 있는 키노 뮤제 자리를 노려 카지노로 바꾸려고 설치는 바람에 항의 시위가 벌어지기도 했다. 이때 베르톨루치나 타란티노 감독도 성원을 보냈다.

이제 한국영상자료원도 한국 영화사만이 아니라 영상문화 전반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새로운 시대적 공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시네마테크이자 영화 관련 문서고, 그리고 연구소 등의 복합 공간으로 거듭 나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현재의 턱없이 적은 예산이 대폭 늘어나야 한다. 또 자료원 측은 상암동 DMC로 이전하면 보다 관객 친화적으로 운영해야 한다. 신임 원장인 조선희씨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

봄비가 창밖을 슬며시 적시고 있는 3월 말 비의 차가운 기운 때문인지 영상자료원에서 영화 보는 내내 따뜻한 커피와 봄 햇살이 그리웠다. 현재 서초동의 자료원에서 한 층 걸어 올라가면 맛있는 커피를 뽑아 주는 카페가 있다. '반도의 봄'에서 봄은 일제 강점기의 역설이지만, 이제 다가오는 봄은 다사로울 것이다. 한국영상자료원에도 풍요로운 봄날이 오면 좋겠다.

김소영 예술종합학교 영상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