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윔슬로가의 유쾌한 청년 ‘찌(Ji)’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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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영국 맨체스터시에서 A538 국도를 타고 남쪽으로 40여 분 달리다 다다른 자그마한 전원도시 윔슬로. 10채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급 주택가의 한 3층 빌라에 박지성(26ㆍ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 산다. 10분 거리에 있던 2층 단독 주택에서 1월 24일 이곳으로 이사 왔다.

박지성이 중앙SUNDAY 창간 준비호에 축하 사인을 했다. 장소는 맨유 구단의 기자 회견실. 최원창 JES기자

맨유로 이적했을 때 앨릭스 퍼거슨 감독이 소개해준 옛 집은 붉은 벽돌로 지은 빅토리아 양식의 오래된 집이었다. 박지성은 지은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새 집이 맘에 든다. 무엇보다 부모님에게 마련해 드린 3층 방에 따뜻한 온돌이 깔려 있는 게 뿌듯하다. 그는 “예전 집이 전통 한옥이라면 지금은 초현대식 집이에요”라고 말했다.

그뿐인가. 옆집에 사는 절친한 친구 파트리스 에브라(프랑스)와 뒷집의 에드윈 판데르사르(네덜란드) 등 의지가 될 동료들이 곁에 있어 좋다. 이곳은 맨유 선수들의 선수촌 같은 곳이다. 집을 나설 때면 어디선가 그의 호칭인 ‘찌(Ji)’가 들려온다.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박지성이 17일 올드 트래퍼드에서 열린 볼턴과의 홈경기에서 시즌 3, 4호 골을 잇따라 터뜨렸다. 박지성은 전반 14분 골에어리어 왼쪽을 돌파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땅볼 패스를 깔아 차 골네트를 흔들었다. 25분에는 호날두의 강한 슛을 볼턴 골키퍼가 간신히 쳐내자 재빨리 달려들어 골문 안으로 밀어넣었다. 박지성의 골은 선발 출장했던 지난달 11일 찰튼과의 홈경기에서 시즌 2호 골을 터뜨린 지 35일 만에 나왔다. 박지성이 한 경기 두 골 이상을 넣은 경기는 프리미어리그 진출 이후 처음이다. [맨체스터 AP =연합뉴스]

호날두·루니 등 동네 친구들과 퍼거슨 감독 몰래 술집서 놀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차 뒤에 숨어서 “찌”라고 부르며 장난을 건다. 동네 주유소에서는 존 오셔가 주유를 하고, 창문을 통해 집 앞을 지나는 퍼거슨 감독을 볼 수도 있다. 동네 어귀 허름한 퍼브(영국식 선술집)는 가끔씩 동료들과 회식하는 곳이다. 경기 일정에 여유가 있는 날이면 리오 퍼디낸드가 퍼거슨 감독 몰래 선수들에게 쪽지를 돌려 만나는 비밀의 장소다. 이곳에서 만난 동료들에게서는 필드에서의 치열함을 찾아볼 수 없다. 선천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호날두와 루이 사아, 에브라도 이곳에서는 술을 먹지 않고도 흥겹게 어울린다. 웨인 루니와 퍼디낸드 등 잉글랜드 출신 선수들은 한번 시작하면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는 주당들이다. 점잖은 판데르사르는 항상 박지성을 돌봐주는 맏형이다. 막 이사 왔을 때도 한 달 이상 걸린다는 인터넷 설치를 하루 만에 해결해줬다. 감사의 표시로 김치와 동태전을 대접했다. 그는 한국 음식 애호가다.

게임하고 책 읽고… 나만의 20평

박지성은 2층을 모두 쓴다. 20평 남짓한 공간이 방과 거실로 나뉘어 있는 이곳은 그만의 휴식처다. 거실에는 소파와 컴퓨터, 게임기에다 비디오 테이프ㆍ책들이 놓여 있다.

박지성의 축구게임 실력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거실은 에브라와 함께 치열하게 게임을 펼치는 곳이기도 하다. 원정경기에 나설 때면 루니와도 게임을 한다. 한여름에도 햇볕을 보기 힘든 곳이라 박지성은 철학자가 다 됐다. 달라이라마와 소설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저서를 읽었고, 최근에는 장편 소설 『오래된 정원』(황석영)과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공지영) 등에 푹 빠져 있다. 종종 외롭다. 박지성은 “친구들이 보고 싶을 때면 당장 한국으로 달려가고 싶어요”라고 말한다. 절친한 친구 정경호(울산) 등 한국에 있는 친구들과 휴대전화가 뜨거워질 때까지 통화하고 나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래도 외로우면 팬들이 보내준 발라드 음악 CD를 듣는다. 울적하면 댄스 음악을 크게 틀어 놓기도 한다.

"잘하자, 잘할 수 있어" 경기장 들어설 때마다 되뇌어

경기가 있는 날 아침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크게 심호흡한다. 창밖을 바라보면 푸른 초원 위에 양들이 풀을 뜯고 있다. 조용히 온몸의 기운을 느껴 본다. 이때 기분이 좋으면 그날 경기가 잘 풀린다. 그가 지닌 유일한 징크스다. 1층으로 연결된 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어머니(장명자씨)가 끓이는 된장찌개 냄새가 구수하게 올라온다. 1층에는 부엌과 넓은 거실이 마련돼 있다. TV가 놓여 있어 어머니가 위성으로 전송돼 오는 한국 드라마를 보는 곳이면서 아버지(박성종씨)가 한국에서 가져온 홍어회에다 소주를 한잔 마시는 곳이기도 하다. 때로는 박지성도 아버지와 소주잔을 기울일 때가 있다.

아침 식사를 마친 뒤 박지성은 구단으로부터 받은 아우디 A6 4.2 콰트로 S-라인 세단을 손수 운전해 경기장으로 향한다. 마을을 벗어나면 평원이 펼쳐진다. 맨체스터 공항을 지나 북쪽으로 달리면 올드 트래퍼드에 도착한다. ‘여기가 영국이구나’라는 절박함이 느껴진다. 경기장에 들어설 때면 “잘하자. 잘할 수 있어”라는 말을 속으로 되새기며 이미 전쟁 분위기로 가득한 라커 룸으로 향한다.

나도 사람이다. 왜 힘들지 않겠나

그를 두고 ‘두 개의 심장’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강철 체력의 비결을 물었더니 “의학적인 검사를 받아봐야겠는데요”라고 농담한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다. 박지성은 “뛰고 또 뛰는데 왜 힘들지 않겠어요. 숨이 턱까지 차오르죠. 하지만 멈추면 실패잖아요. 그래서 참는 거죠”라고 말했다. 박지성의 체력은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물이다. 경기를 마치고 인터뷰실로 향했다. 기자들은 항상 “개인적인 목표가 뭐냐”고 묻는다. 조금은 지겹다. 그는 단 한번도 개인적인 목표를 세워본 적이 없다. 오로지 몸담고 있는 팀의 승리만을 위해 묵묵히 뛰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자신의 이름 앞에 ‘최고’라는 수식어가 달려 있을 때는 쑥스럽다. 그는 “사람들은 날 칭찬하지만 나는 아직 기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아요. 아직 완벽한 선수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샤워한 뒤 패밀리 룸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부모님을 다시 만났다. 일반인과 기자들의 출입이 허용되지 않는 이곳에서는 구단 관계자들과 선수들,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다과를 함께한다. 박지성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수고했다”고 격려해준다. 집으로 가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하면서 그는 패밀리룸의 벽면을 살핀다. 그동안 맨유에서 뛰었던 선수들의 이름과 국적이 모두 새겨져 있는 ‘전설의 벽’이다. 하지만 아직 박지성의 이름은 그곳에 없다. 그보다 두 달 먼저 입단한 판데르사르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적혀 있다. 판데르사르 이름 밑의 빈 공간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얼마 뒤에는 내 이름도 ‘KOREA’와 함께 새겨지겠지?’ 그는 희망을 간직한 채 어둑해진 올드 트래퍼드를 떠나 가족들과 함께 윔슬로로 돌아간다.

맨체스터=최원창 JES 기자

▶박지성의 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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