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주(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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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식사는 포도주로부터 시작한다. 프랑스 여행을 하다가 웬만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먹으려면 우선 포도주 한병부터 마시게 된다. 물론 「강제」는 아니다.
로마에 갔으니 로마법을 따르자는 식이지만 웨이터의 식사주문 접수부터가 어떤 포도주를 들겠느냐고 묻는다. 포도주병의 크기도 다양해 양을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다. 이를테면 프랑스는 낮술의 천국이다.
우리도 예부터 반주라는게 있다. 좀 행세깨나하는 집안이면 아침부터 식사에 곁들이는 반주상을 차렸다. 격식을 가리지 않는 소탈한 성품이거나 좀지체가 낮은 집안이면 밥상의 합뚜껑 또는 식기뚜껑에 가양주를 따라 반주를 하고 식사를 시작한다.
시골에서는 생일잔치를 대체로 아침식사로 한다. 생일잔치쯤이면 식사전에 으레 가양주를 한순배 돌린다. 정월대보름날 마시는 「귀밝이술」도 아침에 마신다.
농부들도 오전 새참과 오후 새참에는 텁텁한 막걸리를 마신다. 식량이 곤궁하던 시절의 막걸리는 배를 채워주는 요기가 되고 취기는 고된 일손을 추스려 나가는데 활력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이러한 아침술과 낮술의 취기는 농사나 건설현장같은 거친 일에는 노동의 능률을 높여 줄지 모르지만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하는 숙련노동이나 화이트칼러의 정신노동에서는 오히려 저해요인이 될 수 있다.
옛날 궁중 임금님의 수라상에도 술을 곁들였다는 구체적 기록은 없다. 『진연의궤』에도 술에 대한 기록은 없고 궁중잔치상차림을 도형화한 『진연도』에나 진작·수주정·주정 등이 나오고 있어 술을 곁들였던 것으로 보인다.
근래 자가운전과 생활풍습의 변화로 본격적인 저녁 주안상이 많이 줄어들고 반주를 곁들이는 점심식사가 유행이다. 웬만한 약속이나 술교제는 점심식사때의 낮술로 때우는게 새 풍속도다.
최근 영국의 한 신문은 낮술이 근무에 큰 지장을 초래한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낮술로인한 노동력의 상실이 연간 1천4백만일,돈으로 1조원이라고 한다. 또 일본의 한 신문은 서울출장때 「폭탄주」에 침몰하지 말라」는 경고성(?)기사를 통해 한국의 폭탄주풍습을 자세히 소개했다.
지난 한햇동안 우리국민은 도매가격기준 2조4천억원어치의 술을 마셨다고 한다. 이중의 상당량은 점심때 마신 「낮술」로 소비됐음직하다. 예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즐겨 마시던 낮술의 낭만도 이제 산업사회의 능률지상주의에 밀려 그 맥이 단절될 것만 같다.<이은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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