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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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사이타마 현의 북쪽에 위치한 군마 현에도 우리조상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 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인 신두 신사를 찾아가기 위해 요시이역에서 내려 택시로 달렸다.
신사의 소재지는 「진보」라는 마을인데 이는 신사의 관리를 맡기기 위해 경비로 내어주는 땅을 뜻하는 지명이다.
그러면 신료신사는 누구를 모신 곳인가. 「신」자는 일본어 발음으로 「가라」인데 이는 원래 우리나라의 가나국을 가리키는 상투어다.
일본 야마토 조정이 초창기에 교류한 외국은 가나국이므로 주로 외국이라는 의미로 사용됐다.
특별히 중국을 가리킬 때에는 「대당」이라 쓰고 「모로코시」라고 읽었다.

<『신』자는 가야 가리켜>
「요(시나)」라는 일본어는 신분·지위·문벌 등을 가리키는 고어다. 따라서 신료라는 이름은 고귀한 한인을 가리킨 것으로 한인의 조상을 모신 신사인 것이다. 일본의 고문헌에는 이 부근의 옛 이름이 「백제장」이라고 기록돼있는데 「장」이라는 것은 지방호족들이 소유한 대농장을 뜻한다. 따라서 이 백제장은 백제인 호족의 대농장인 것이다.
군마현의 옛 이름은 상야(고주케)국으로 14군으로 나눠져 있었다. 이 14군중에 감악군과 다호군이 있었는데 감악군의 「감」자는 일어로 「강」이라고 읽어 「한(강)」과 같은 발음이다. 「악」자는 일어로 「라」라고 읽어서 「나」와 발음이 같다. 따라서 「감악」은 「한나」를 의미하며, 나는 나·야와 더불어 국토를 의미하니 결국 한토·한국을 상징한 군명인 것이다.
그런데 711년 3월 중앙정부는 칙령을 내려 앞에서 쓴 감악군의 4개 마을과 이웃의 2개 마을을 합쳐 다호군이라는 새 군을 설치했다.「호」자의 의미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6개마을에 거주하던 한인들을 오랑캐로 보고 그들만이 사는 특별행정구로 다호군을 설치한 것이다.
그러면 어째서 한국으로부터 아득히 멀고 먼 일본 북관동 지방의 변지에 우리 조상들이 살게 되었을까. 그 이유를 시사하는 듯한 기록이 일본서기 중 『5세기전후 야마토조정이 해외로 세력을 폈다』는 기록이다.
이에 비하여 우리의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눌기왕대로부터 자비왕대(417∼479년)에 걸쳐 전후 여덟 번이나 왜의 침공이 있었다고 기록돼 있으며, 특히 462년에는 일본인이 신라인 1천명을 사로 잡아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상의 기록에서 일본인이 한반도에 침입해 포로를 많이 데려갔음을 억측할 수가 있다. 이때의 포로들이 이 지방에 정착하여 한국의 옛 고향 이름을 따서 「감나」라고 부른 지명이 이후 감악군으로 된 것이라 생각된다.
또 앞에서 인용한 삼국사기의 기록과 같이 일본에 끌려온 신라인 1천명 외에도 이 지방에 신라인이 살게 된 원인으로 5세기중엽 야마토조정이 칙령을 내려 뽕나무가 잘 자라는 이곳에 일찍이 도래한 진씨족을 이주시켜 견직물을 공납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신라인 천여명 포로로>
요시이역으로부터 동북쪽으로 2㎞쯤 떨어진 어문(미카도)이라는 곳에 711년 다호군을 설치했을 때의 기념비인 다호비가 있다. 이 비문에는 6줄로 80자의 한문이 음각되어 있는데 이를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괄호 안은 필자의 주).
중앙관청의 문서에 상야국(군마현)의 편강군·녹야군·감량군 등 3군중의 3백호로 군을(새로) 이루어 양이라는 자에게 주어서 다호군이라고 한다(이하 생략).
이상은 앞에서 쓴 바와 같이 6개 마을 3백 가구를 묶어 새로 다호군을 만들어 양이라는 자에게 주었다는 내용이다. 이 비문의 해석에 있어서 일본의 학회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양」에 대한 해석이다. 즉 「양」자를 사람의 이름으로 취급하느냐 또는 방향을 나타내는 것으로 취급하느냐 등등 학자에 따라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현재는 사람의 이름으로 취급하는 견해가 유력하다. 그리고 이 비석을 양의 신령으로 모시어 양신님이라 부르고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 또 이 부근 마을에는 따로 「양신사」가 있어 양대부를 모시고 있다. 양대부의 후손들은 다호씨라고 하며 일설에는 주씨 족이 다호군 설치 후에 다호씨라고 자칭했다 한다.
양 또는 양대부라고 불리는 이 사람에 관해 고대로부터 여러 가지 믿지 못할 전설이 많다. 한 예를 들면 양대부는 준마를 타고 매일 나라의 조정까지 출근했다는 전설이다. 나라까지의 거리가 수만리가 되는데 아무리 준마를 타고 간다한들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이 전설의 근원은 양대부가 신라로부터 도래한 사람인데 구리 만드는 기술을 가져 이웃의 질부군 흑곡촌에서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동굴을 발견하여 조정에 동을 공납했다 한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이를 기려 연호를 「화동」이라고 개칭하고 이곳에 주전사라는 동전을 제조하는 관청을 두어 양대부에게 관할시켰으므로 양대부가 매일 이 주전사에 준마를 타고 출근한 것을 설화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당시 중앙정부에서는 그의 공로를 기려 앞에서 쓴바와 같이 새로이 다호군을 설치하여 군수로 임명했다는 것이 사실일 것이라고 인정되고 있다.

<지금도 『다호비』건재>
하여튼 일본에서의 광물(금·은·동)발굴은 모두 우리한족 도래인 들이 처음으로 시작한 것으로 한족이 개척자였던 것이다. 이 다호비는 일본의 3대 고비의 하나로서 고대사를 증명해 주는 귀중한 금석문의 제1호로 인정받고있는 것이다. 단희린<동국대 일본학 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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