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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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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김구는 이승만과는 정치노선이 달랐다. 이승만은 공산당과는 합작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찍부터 간파하고 남반부에서 만이라도 빨리 독립을 달성해야겠다고 주장하였지만 김구는 이와 반대로 어떻게든지 좌우가 합해 새 국가를 만들어야지 남북이 따로따로 국가를 성립시키면 영구히 두 나라로 갈라져버린다고 주장하였다.
이 때문에 김규식과 함께 평양에 가서 남북협상까지 해보았지만 실패하고 돌아왔다.
대한민국이 성립된 뒤인 11월 김구는 미소양군이 철수한 후에 통일정부를 수립하자는 취지의 담화를 발표해 종래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이 담화를 발표한 동기는 대한민국이 성립된 직후인 1948년 9월 평양측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포하고 곧이어 소련이 북한에서 군대를 철수하겠다고 발표한 뒤, 12윌 철병을 완료했다고 공식 발표하였다. 이것을 보고 미군도 어서 철수하라고 종용하는 뜻으로 이런 담화를 김구가 발표한 듯한데 미국에서는 다음해 5월 국무부 발표로 미군도 철병할 뜻을 전했고, 6월 철수완료를 공표하였다. 유엔측도 미군철수를 확인했다.
이러던 차인 6월29입 김구가 암살되었다.
김구의 암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로 풍문이 많았고 범인 안두희는 지금까지도 배후를 말하지 않고 있다.
해방후에 민주적인 통일국가를 세우는데 있어 가장 시급한 일은 극성을 부리는 일제 잔재세력의 망동을 억제하고 그 세력을 뿌리자 뽑아버려 말끔히 없애버리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친일파이라는 소리가 전국민사이에 일어나게 된 것이다.
여기서 친일파라고 규정짓는 부류의 사람은 가족들의 생활을 위해 식민지 통치기관에 하급관리로 근무하고 있었던 선량한 봉급생활자라든가, 일본인 상대로 사업을 했다든가 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과 영달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제와 협력해 민족에 해를 끼친 악질분자를 말하는 것이다. 즉 한일합방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든가, 일제의 고등경찰로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체포·고문·학살했다든가, 또는 식민지 지배층으로 민족말살 정책에 적극 협력했다든가 하는 부류의 악질분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당연히 새 나라에서 배제되어야할 사람들인데 미군정청은 일제아래에서의 한국인 관리들을 아무런 구별 없이 단지 경험자라는 명목으로 그냥 그대로 채용했다. 미군정청의 이런 무분별한 관공서 채용은 경찰부문에서 더욱 두드러져 1946년 현재 군정청 경찰간부의 80%가 고등경찰 출신을 비롯한 일제 때의 경찰관으로 채워져 있었다. 경위의 83%, 경감의 75%, 총경의 83%, 국장급의 80%, 경찰서장의 63%가 일제 때부터의 경찰출신자였다. 이에 대한 민중의 빗발치는 반대소리에 자극되어 1947년 7월 미군정청안에 설치된 입법의원에서는 「부일협력자와 민족반역자 간상배에 대한 특별조치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군정청은 친일파를 구분하기 곤란하므로 이 안건은 독립된 뒤에 민선의원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해 인준을 거부했다.
이에 따라 독립후 제헌국화는 헌법 제101조를 근거로 하여 1948년8월 「반민족행위처벌법안」을 상정, 심의하였다. 먼저 정부안의 친일파를 숙청하는 「정부내 친일파 숙청에 관한 건의안」을 가결하여 대통령의 조치를 요구한 다음 열띤 토론을 거쳐 9월7일 재석 1백41명중 1백3표의 압도적 다수로 반민법을 통과시켰다.
국회의 반민법 심의 과정에서는 많은 파란이 있었는데 친일분자들은 반민법을 발의한 국회의원을 공산당이라고 협박하고 난동을 부렸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조사업무를 개시해 반민족행위자 7천여명을 파악하고 1949년 1월9일부터 검거활동을 개시하여 친일실업가 박흥식, 고등밀정 이종영, 중추원부의장 최린, 강우규의사를 체포해 처형케 한 김태석, 도지사를 지내고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장을 지낸 이성근, 친일문인 이광수와 사학자 최남선, 군용기헌납에 광분한 문명기 등 드러난 친일파를 계속 체포해갔다.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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