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540)-서울야화(7)-해방직후 세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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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여기서 잠깐 해방후의 세태와 민심의 움직임에 대해 이야기해야할 필요가 있다. 해방 후 얼마동안은 일본인들의 지긋지긋한 압제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된 것이 기뻐 마음이 모두들 너그러워졌다.
우리 동포끼리 오붓하게 살수있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쁘냐고 하면서 없는 사람에게 쌀도 주고 음식도 주고 돈도 빌려주며 인심좋게 잘 지내왔다.
큰길에선 거지들이 없어졌고, 옷가지가 없는 사람에겐 옷을 나눠주어 모두들 허여멀겋게 옷을 입고 다녔다.
거리에는 여기저기 일본사람이 쓰다 버리고 간 세간·의복·그릇·책·그림같은 것을 너저분하게 쌓아놓고 헐값에 팔고 있었다. 그속에는 정말로 값진 물건도 있어서 좋은 골동품·그림도 있었고 쉽게 구할수 없는 서양 물건도 많았다.
이것들을 닥치는대로, 값 부르는대로 팔아넘기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전문으로 사러다니는 장사꾼이 생기게 되었다.
어떤 장사꾼은 어울리지도 않는 좋은 양복과 외투를 입고 으스대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것은 돈을 내고 산 것이지만 불량배들은 규모가 크고 부잣집처럼 보이는 집에 마구 쳐들어가 「접수」한다고 호통을 치고 세간과 의복을 막 빼앗기도 하였다.
그때 「접수」란 말이 앞서 말한대로 크게 유행해 큰 회사나 공장에는 대문과 담벼락에 「접수」라는 큰 글씨로 쓴 붉은 딱지를 군데군데 붙여놓고 어느 자취위원회, 어느 독립운동단체에서 접수한다고 써놓았다.
그전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살기가 등등해 이런 접수딱지를 붙여놓고 가면 그집 물건은 죄다 그 패들의 소유가 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손을 대지 못했다.
악독한 일본사람들도 후환이 두려워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불량배들이 하라는대로 복종하였다.
섣불리 항의를 하고 덤볐다가는 제나라 일본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몰살당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그동안에 쌓이고 쌓였던 일본사람에 대한 분풀이라고 생각되어 그랬는지 이런 짓을 마구해도 아무도 말리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불량배들은 마음놓고 이런 불법행동을 저질렀는데 미군헌병(MP)들은 참견도 하지 않고, 또 무슨 일인지 알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마음 좋은 MP를 따라다니면서 『오케이』니, 『헬로』니 하는 미국말을 배워 그들의 환심을 사 껌이나 사탕을 얻어먹었다.
우리나라 사람은 남에게 선심을 잘 쓰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어서 미군들이 우리를 구해주고 해방시켜준 크나큰 은인이라고 생각해 그들을 극진하게 대접하였다.
날마다 번갈아가면서 미군을 청해다 질탕하게 음식을 먹이는 것이었다.
불고기·갈비집을 푸짐하게 만들어 배가 터지도록 먹이고 좋은 도자기를 선물로 주었다.
일본에 있다 한국으로 전근해온 미군들은 이런 광경을 보고 모두 크게 놀랐다. 일본에서는 미국이 적국이었으므로 미군에게 절대로 호감을 갖지 않았다.
길에서 『헬로…』 하고 인사해도본체 만체 하고 도망치듯 지나가는 것이 일본사람의 미군에 대한인사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모두들 미군을 환영해 악수를 청하고 저녁에는 집으로 불러 술과 고기를 대접하고 선물을 주니 이런 낙원이 어디 있느냐고 놀라며 좋아하였다.
이렇게 해서 미군과는 퍽 사이좋게 지냈고 일본에서와 같은 적대관계는 없었다.
미국은 물자가 풍부한 부자나라인 만큼 군인에게 배급하는 물품이 많아서 이것이 민간으로 많이 흘러나왔다.
갖가지 좋은 화장품·옷감, 그밖에 좋은 일용 잡화가 시장으로 쏟아져나와 서울에는 미국 물건만을 파는 큰 시장이 몇군데씩 생겨났다.
이 시장에 들어가면 우리들이 보지 못했던 편리하고 신기한 물건을 많이 살수 있었다.
이런 물건이 나오는 곳이 동대문 서울운동장앞 넓은 터전이라고 해서 어느날 새벽에 구경하러 가본 일이 있었는데 참으로 장관이었다.
어스름한 새벽에 어디서 왔는지 큰 트럭 서너대가 나타나 짐짝을 내던지듯 땅에다 부려놓는 것이었다.
그러면 트럭 주위로 사람들이 개미떼같이 모여들어 저희들끼리 흥정해서 순식간에 지폐가 오가고 한쪽으로 리어카가 와서 물건을 싣고 제각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이런 모든 행동이 순식간에 이뤄져서 눈깜짝할 사이에 넓은 터전이 아무 흔적도 없이 그전대로의 고요한 광장으로 돌아갔다. MP가 나타날 틈도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이들 개미떼같은 장사꾼 속에서 오늘날 누구누구 하는 큰 재벌들이 생겨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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