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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 히말라야 #5신] 얼음의 바다위에 선 니엔칭탕구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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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복(conquest)? 인간이 어찌 자연을 정복할 수 있을까?

스웨덴 출신의 탐험가 스벤 헤딘(Sven Hedin,1865-1952)은 그의 저서 '티베트 원정기'와 '트랜스 히말라야'에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티베트인 외에 어느 누구도 이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이곳은 내 땅이었고, 나는 이곳을 정복한 것이다."

1907년 스벤 헤딘은 티베트탐험 도중 강띠스(岡底斯)산맥과 니엔칭탕구라산맥(念靑唐古拉山脈)을 발견하고 정복이란 단어를 서슴지 않고 사용했다. 지금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가 장기간 탐험에 나서기 위해선 큰 스폰서가 필요했다. 그 스폰서는 다름 아닌 제국주의 정부였다. 독일 정부(루프트한자 항공사)로부터 탐험경비와 기타비용을 비밀리에 받아 탐험에 나섰다. 그는 탐험의 성과와 지리학적 결과를 발표해야했다. 그래선지 다소 과장된 그리고 겸손치 않은 단어로 '정복'이란 말을 사용한 것 같다.

하지만 그가 처음이었을까?

라켄라 고개에서 바라본 나무초의 겨울풍경. 한가로운 야크 때가 풀을 뜯고 있다.

'아니다'라는 답 대신 아래의 일을 들춰본다.

1892년 당시 인도측량국이 파견한 반디트(Pandit, 티베트탐사의 밀정)들에 의해 스벤 헤딘이 이곳에 도착하기 15년 전, 이들은 이미 니엔칭탕구라산맥 동부에 위치한 세푸캉리(色浦崗日, 6956m)를 남쪽으로 지나 라리(4470m)->곰보걈다(工布江達, 3400m)->라사로 들어갔다. 이들은 이곳에서 많은 정보를 캐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배 하에 있었기에 이 정보는 영국의 정보와 다름없었다.(스벤 헤딘이 출간한 저서 중 '트랜스 히말라야(총 3편)'를 보고 영국에서는 어떤 반응이었을지 궁금하다!)

또 1994년 영국의 유명한 산악인자 탐험가인 크리스 보닝턴(Chris Bonington. 1934 ̄ )공이 1억5000만원의 입산료를 지불하며 당시로서는 지도의 공백지대인 동부 니엔칭탕구라산맥의 세푸캉리를 등반하려 했다. 티베트탐사 밀정들이 수집한 정보가 바탕이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초기 영국 밀정들에 의해 수집된 정보와의 개연성을 잘라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스벤 헤딘이 분명히 '최초'였던 것은 있다. '트랜스 히말라야' 즉 히말라야의 뒤쪽에서 히말라야와 같이 동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것이다. 영국은 인정하고 있지 않지만 '트랜스 히말라야'라는 명칭은 현재 많은 산악인과 탐험가, 그리고 학자들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체투지로 라사로 향하는 일가족. 그들의 신에 대한 신념은 도로에서도 이어진다.

필자의 의견을 이야기하자면 현지인이 사용하는 산맥 고유의 이름을 사용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이유는 역사성과 현지성을 바탕으로 산맥 이름이 사용돼야 하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Everst, 8850m)와 카라코람(Karakoram)산맥이 영국에 의해 불리기 전 초모룽마(Chomo Lungma)와 무즈따그(Mztagh)라고 현지명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상기해야 한다. 또 우리가 배워 온 태백산맥(太白山脈)이나 차령산맥(車嶺山脈)이 일본의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의 조선산악론(朝鮮山岳論, 원제 An Orogrphic Sketch of Korea)에 의해 왜곡된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백두대간진흥회에 의해 펼치고 있는 우리 고유의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 바로 찾기' 같은 운동이 히말라야 현지에서 일어나길 기대해 본다.

8일(현지시간) 대원들의 컨디션은 말이 아니다. 탕구라(唐古拉)산맥 탐사를 위해 이틀 만에 표고차 2000m를 올라 심한 고소증을 보인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 담슝을 지나 우리는 나무초(納木錯, 4718m)로 향했다. 나무초는 티베트인들이 신성시하는 4대 호수 중 하나다.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염호다. 이곳이 1억8000만년 전 바다였다는 증거다. 대륙이동설에 따르면 1억5000만년 전 곤도와나 대륙(고대남반구에 있던 대륙)에서 분열한 육지가 계속 북상해 약 5000만년 전에 유라시아 대륙과 충동해서 현재의 인도 아대륙(亞大陸)이 생겼다. 이때 티베트고원과 '트랜스 히말라야'가 만들어졌다. 대륙이 충돌하며 주름진 서부 티베트 고원의 최고봉이 바로 이 나무초를 감싸고 있다.

라켄라(那根拉, 5190m)고개를 넘어서자 신준식씨는 최악의 컨디션을 보인다. 검게 그을린 그의 얼굴에선 한줄기 식은땀이 흐른다. 하지만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겨울 나무초의 풍광을 놓치지 않고 힘들게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는 미안한 마음에 물만 권한다. 우리가 빌린 차가 나무초의 곰파에 도착했다. 이곳은 아직 봄을 생각하기엔 이른 계절이다. 여름이면 하늘 담은 푸른빛을 자랑하던 이곳이 지금의 얼음의 바다로 변해있었다. 설산과 하나 되는 어울림 속에 시간이 멎은 듯한 고요가 감돈다.

"머리가 아파요."

"참아."

히로코도 계속되는 두통을 호소하지만 별다른 답이 없다.

나무초를 뒤로하고 집으로 향하는 티베티안들의 발걸음 뒤로 평온한 나무초의 겨울풍경.


마음이 아프다. 두 대원 모두 어설픈 나의 열정을 따라 사서 고생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들의 도움에 답할 수 있는 건 오직 이번 탐사가 무사히 끝난 후의 성취감과 추억뿐이다. 그것을 먼저 말하기에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 좋지 않다. 단지 무조건 사진 찍고 빨리 움직여야 한다고 다그치는 말밖에는 건 낼 수가 없었다.

멀리 니엔칭탕구라산맥이 시야에 들어온다. 니엔칭탕구라산맥은 라리를 기준으로 서부와 동부로 구성된다. 우리가 서있는 이곳은 니엔칭탕구라 서부의 거의 끝이다. 이곳은 칭짱고원(靑藏高原)의 일분을 형성하고 있다. 7000m 이상의 봉우리 네개가 이 산맥 서쪽에 집중된다. 하지만 이곳을 제외하면 라리까지 인상적인 봉우리는 없다. 멀리 니엔칭탕구라산맥의 최고봉 니엔칭탕구라산(7162m)이 나무초 너머 거대한 덩치를 자랑한다. 1982년 일본의 도호크대학(東北大學) 팀이 초등한 곳이다. 다른 7000m의 봉들도 모두 초등되었다.

우리의 관심은 서벽과 동벽의 사진을 모두 찍는 일이다. 초등은 놓쳤지만 다른 등반선을 찾아 루트 초등에 대한 도전이 우리에게 남은 과제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빨리 움직였다. 다행히 좋은 날씨로 인해 두 방향의 사진을 모두 찍을 수 있었다. 모두에게 감사했다.

서둘러 탐사대는 3658m의 라사로 발길을 돌렸다. 멀리 도시의 불빛이 다가온다. '신들의 땅' 이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대원들이 고소증이 빨리 좋아지기를 기도하며 9일 야크호텔로 향했다.

글=임성묵(월간 사람과 산)
사진=신준식·스즈키 히로코


※트랜스 히말라야 홈페이지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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