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육의원 앞세워 친척 달래|엄격한 단속불구 일부선 「잡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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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먼저 박대통령의 친인척 통제스타일을 생생히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청와대민정비서실에서 친인척문제에 관여했던 Q씨의 증언.
『하루는 박대통령이 박승규민정수석을 불러 이렇게 묻더래요. 「이봐, 자네 우리 누님 회갑잔치 알고있나」라고요. 민정비서실은 며칠전 「회갑잔치가 조촐하게 치러질 것」이라고 보고했었거든요. 그래서 박수석은 무슨 일인가 싶어 가만히 있었다죠.
아 그런데 박대통령이 호통치더래요. 「민정수석이 도대체 뭐하고 있는거야. 지금이 어느땐데 도큐호텔에서 7∼8명이나 모여 호사스럽게 잔치를 해. 누구누구 갔었는지 조사해」라고요.

<누이회갑연도 조사>
그래서 우리가 알아봤죠. 그때 박대통령 막내누님 재희여사가 회갑을 맞아 박대통령혁명동지등 7∼8명이 모인거예요. 음식값은 박여사 아들이 계산했는데 사실은 사전에 하객들이 회갑을 축하한다며 봉투를 내놓았었던거죠. 형식이야 박여사가 초청한 걸로 되어있었지만 그런 사연이 있었던거예요.
영수증까기 붙여 보고했더니 박대통령은 박수석에게 이랬다는거죠. 「이봐, 본인들한테 통보해. 다시는 그런짓 하지말라고. 우리 누님은 그사람들하고 호텔에서 저녁 먹을 만큼 유식한 분이 아냐」라고요.
그래서 박수석은 일일이 그사람들에게 「오해하지 마라. 각하께서는 가족관계일은 신경과민이니까」라면서 좋게 이야기했어요.』
박대통령처남 육인수전의원(육영수여사 오빠) 은 『견제당했던 스토리라면 얼마든지 가지고있다』며 이런 일화를 내놓았다. 「하루는 박대통령이 나를 부르더니 「요새 육의원 평판이 별로 좋지않은 사업가와 호텔롯데에서 자주 만나 식사를 한다는데 어떻게 된거야」라고 묻더군요.
나는 하도 어이가 없어 이렇게 말했지요. 「아니 각하, 민정비서실이란데가 그렇게도 할일이 없습니까. 나라세금이 아깝습니다. 제가 나이가 몇인데 사람하나 가리질 못하겠습니까. 그리고 사람 만나는걸 꺼리면 국회의원을 어떻게 합니까」라고요.
이런 일도 있었어요. 어느날 들어가는데 문앞에 서성거리더라고요. 「누구냐」고 물었더니 인근경찰서래요. 그래서 그러냐고 집에 들어왔는데 그때서야 「왜 저사람이 저기 서있나」 싶더군요.
그래서 박대통령을 만나는 기회에 그 일을 꺼냈지요. 「각하가 시키셨습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랬더니 박대통령은 조금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시면서 「내가 친인척집에 경찰관을 배치해 동향보고 하라고 시켰는데 육의원집만 빼놓으면 이상할 것같아 그랬어. 육의원 미안해.
내가 얘기해서 철수시킬께」라고 하시더군요.』
육씨는 『대통령으로부터 직접들은 이야기』라며 이런 에피소드도 들려주었다.
『61년 혁명후 박대통령이 최고회의장이 된지 얼마안있어 한번은 고향 상모리에서 농사를 짓고있던 큰형님 동희씨가 찾아왔대요.

<집앞에 형사배치>
큰형님은 「고향사람들이 나더러 이제는 나라를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해야한다고 한다」며 몇가지 사업이야기를 하더라는거죠. 그래서 박대통령이 사람을 시켜 알아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권사업이었다는 겁니다. 주위사람들이 동희형님을 부추긴거죠.
박대통령은 큰형님 기분이 상하지않게 「형님, 알겠습니다. 그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테니 형님은 내려가서 농사일을 계속 하시죠라고 했대요. 박대통령은 형님이 내려가자마자 고향 경찰에 지시해 형님댁 앞에 보초를 세우도록 했다는 겁니다. 출입자를 일일이 체크해 보고하도록 한거죠.
박대통령은 그 정도로 엄격했어요. 고향친척중 누군가가 서울로 올라와 사업하겠다고 하면 화를 내곤 했다지요. 「도대체 내가 뭐가 됐다고 시골서 농사짓던 사람들이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느냐」는 거였죠. 박대통령은 자기 말을 듣지않으면 아예 청와대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도록 한 경우도 많아요.』
박대통령은 친인척관리에 있어 축구 「포스트작전」(키큰 선수를 박아두고 중점 활용하는것)을 구사했던 모양이다. 즉 몇몇 인사를 대표로 키워 친인척그룹의 야망을 흡수하는 방법이다.
우선 본가족을 보자. 첫번째부인에게서 얻은 딸 박재옥여사와 사위 한병기씨가 있고 형4명, 누나 2명 밑에 열댓명(일부는 일찍 사망)의 조카가 포진해있다.
본가족 포스트(주축)는 물론 JP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위 한씨, 동양철관을 경영해온 장조카 박재홍씨가 혜택을 본 정도라고 하겠다. 13대때 구미에서 사촌형 박재풍씨와 일전을 겨루었던 박준홍씨 (셋째형 상희씨 외아들) 도 축구협회장을 지내는등 내막적으로 움직였지만 두드러지지는 않는다.

<「포스트작전」 활용>
처가족 중심은 육인수씨다. 육어사의 여자형제 인순(언니)·예수 (동생) 밑에 있는 조카 10여명중에는 홍세표씨(외환은행전무)가 있으며 처조가 사위쪽에 장덕진·한승수(전상공장관·13대의원)·윤석민(전대한선주회장·11대구국민당부총재) 등 「알만한」 이름이 보인다.
박정희가 사정을 잘아는 정치인 C씨는 「포스트작전」을 이렇게 설명했다.
『박대통령은 일찌감치 몇몇 사람을 대표주자로 고른것 같아요. 정치는 JP하고 육인수씨만 시키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볼수 있죠. JP야 혁명을 같이했으니 0순위였고 처남 육씨를 국회로 진출시켜 처가의 정치욕구를 소화해 버리자는 계산이죠.
물론 8대때 사위 한씨(강원 속초-고성-팔양)와 처조카 사위 장씨(서울 영등포)를 진출시켰었지만 일부는 박대통령 뜻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도 있고요. 그러니 유신이후 9대때는 두사람 다 얼른 거두어 들였잖아요.
그리고 장씨는 계속 행정관료로 키우겠다는 생각이었으며 장조카 박재홍씨에게 사업을 시키면서 조카그룹을 신경쓰도록 하고요.
대통령친인척이란 이유로 무조건 잠자코 있게만은 할 수없지만 그렇다고 분수를 넘어 누구나가 나서게 해서는 안된다는 철학이었지요.』
「포스트작전」에 견제당한 이중 하나가 한병기씨라고 보는 사람이 많다.

<한병기씨 공천 탈락>
통역장교출신인 한씨는 53년 박정희5사단장 전속부관으로 인연을 맺어 사위가 됐다.
한씨는 일찍 정계진출욕구를 불태웠으나 좌절됐고 「내부충돌」까지 빚은 경우도 있다고한다.
한씨(61·현설악관광회장)의 증언.
『66년 8월 주뉴욕영사를 마치고 돌아와 그때부터 국회의원을 향해 뛰었습니다. 원래 내가 평남 안주출신이라 이남엔 아는 곳이 없어 휴전선과 가까운 속초-고성을 택했죠.
박대통령한테 이야기해봐야 「네가 무슨 정치를 하겠다고 그래」라고 꾸중들을게 뻔해 육여사한테 조용히 SOS를 청했지요. 육여사가 귀뜀했는지 박대통령은 「자네 국회의원 준비한다며」하면서 별 말씀을 않더라고요.
그런데 67년 봄 선거가 가까워 오자 박대통령은 나를 부르더군요. 박대통령은 아무말없이 정보기관서류하나를 보여주어요. 거기에는 내 당선가능성이 50%라고 써있더군요. 대통령사위가 50%라는건 사실상 그보다 훨씬 못하다는 얘기잖아요.
박대통령은 조금 어렵지 않겠느냐」며 내가 포기할 것을 바라는 눈치예요. 그래도 나는 「그 기관 보고서가 잘못된것 같습니다. 나는 자신있습니다」라고 했죠. 박대통령얘기가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물러나오면서 「나를 공천에서 떨어뜨리지는 않겠지」 하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그러나 웬걸 공천발표 당일새벽에 정보를 들었는데 내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오전7시에 청와대에 올라갔지요. 박대통령은 나를 앉혀놓고 친인척문제를 설득하더군요. 「알겠습니다」하고 나올 수밖에 없었어요.』
박대통령은 71년엔 한씨를 풀어줘 출마하도록 허락했다. 그러나 그때도 내심은 상당히 꺼렸으며 때문에 한씨는 다시 육여사쪽을 뚫어야했다는 후문이 있다.
박대통령이 엄격해도 친인척문제는 사람의 일이라 다소 소란과 잡음이 따른 경우가 있었다한다. 친인척 본인이 조금만 느슨해져도 주변에 계산 빠른 인사들이 꾀어들거나 부질없는 호의를 베풀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유승원·김시진·박승규씨로 이어지는 민정수석비서실은 대통령의 친인척관리작전을 수행하면서 대통령과 친인척 사이에 끼여 나름대로 말못할 사연을 쌓아왔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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