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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 애니 '붉은 돼지' 스크린서 만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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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의 ‘붉은 돼지’가 오는 19일 뒤늦게 국내에 개봉한다. 앞서 우리 관객들이 만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년작) ‘이웃집 토토로’(88년) ‘모노노케 히메’(97년)같은 작품이 인간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에 대한 미야자키의 애정을 담뿍 보여주었다면, 1992년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인류가 문명의 이름으로 저지르는 전쟁에 대한 그의 혐오감을 유쾌하게 그려낸다.

'붉은 돼지'의 첫 장면은 지중해 외딴 섬의 해변에서 유유자적하는 인물로 시작한다. 비행기를 탄 해적(실은 '공중적'이다)들이 여객선을 공격했다는 무선이 들어오자 고개를 드는 얼굴은 돼지 그 자체다. 주인공 파르코는 본래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름을 떨쳤던 전투기 조종사. 그러나 공군에서 탈영한 뒤 스스로 마법을 걸어 돼지의 얼굴이 돼버렸고, 해적과 대결하는 일을 업으로 살아간다. 파르코에게 수모를 당한 해적들은 미국 출신의 조종사 도널드 커티스를 영입해 그와 싸우도록 한다.

'붉은 돼지'의 배경은 20년대 말의 이탈리아로 설정돼 있다. 그러나 현실의 세계라면 돼지로 변하는 마법 따위가 먹힐 리 없다. '붉은 돼지'의 세계는 납치된 유치원생들이 해적에 겁먹기는커녕 하늘을 나는 기쁨에 들떠서 비행정을 점령하다시피하고, 해적들은 그런 꼬마들을 도통 감당하지 못하는 식의 세계다. 얼굴은 돼지라도 버버리 깃을 멋지게 세운 파르코에게서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 뺨치는 '분위기'가 흘러나온다.

'돼지'는 여러 나라에서 욕설로 통용된다. 파르코는 돼지의 얼굴을 자처함으로써 돼지만도 못한 인간들이 벌이는 전쟁으로부터 확연한 거리를 둔다. 파시즘이 스물스물 준동하는 시기에 애국채권을 사라고 권유하는 은행원에게 파르코는 "사람이나 할 짓"이라고 싸늘하게 거절한다. 감독은 파르코에 돼지의 얼굴을 씌우는 것을 시작으로 현실과 공상의 경계를 허무는 팬터지를 쌓아나간다. 그리고 결국 관객 앞에서 승자가 되는 것은 대공황의 여파와 또 다른 전쟁의 조짐으로 암울했던 현실이 아니라 감독이 만들어낸 공상과 낭만의 세계다.

'붉은 돼지'는 단추 하나로 대량살상이 가능해지기 이전의 수공업적인 기계문명에 대해서는 호의적인 시선이 역력하다. 나무를 톱질하고 함석을 두드려 만든 구형 비행기들이 색색의 자태를 자랑하면서 하늘을 날 때가 '붉은 돼지'에서 가장 신나는 장면이다. 그 아래 펼쳐지는 아름다운 풍경에는 히사이시 조의 경쾌하고 낭만적인 음악이 더해진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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