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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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인간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잊어버려도 좋은 것은 잊지 않고,잊지 말아야할 것은 쉽게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그것을 흔히 건망증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자들의 해석은 좀 다르다. 인간이 무엇을 잊는다는 것은 잊고 싶다는 무의식적 욕망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가령 사람들이 남에게 갚아야할 돈은 곧잘 잊어버리지만 받아야할 돈은 잘 기억한다. 그것은 돈을 갚기보다는 받고 싶어하는 무의식적 욕망때문이란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건망증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고 현대의학은 부연한다. 사람이 피곤하거나 기분이 울적하면 기억력 자체가 망가지지는 않더라도 그 활성도가 떨어져 건망증을 일으킬 수 있다. 또 긴장상태나 주의력이 산만한 상태에서도 건망증이 따르게 마련이다.
지난 86년 「국민의 힘」에 떼밀려 남편과 함께 도둑고양이처럼 말라카냥궁을 떠났던 이멜다가 4일 많은 지지자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으며 의기양양하게 필리핀으로 돌아갔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녀는 사람들의 건망증을 믿었는지 귀국 직전 망부 마르코스의 유해가 있는 호놀룰루에 들러 한바탕 정치적인 쇼를 연출하기도 했다. 악명높은 「이멜다의 구두」를 놓고 아키노 대통령을 향해 벌인 설전이 바로 그것이다.
마르코스­이멜다부부의 독재와 부정부패의 상징처럼 된 그 구두를 필리핀당국이 주인에게 돌려주겠다고 발표하자 그녀는 가시돋친 목소리로 『돌려받아봤자 모두 유행에 뒤진 것들이니 아키노 대통령이나 신으라』고 응수했다.
이멜다가 노리는 것은 내년 5월에 실시되는 대통령선거다. 그동안 여러가지 악조건 속에서도 비교적 무난하게 필리핀을 이끌어 왔던 아키노 대통령은 임기를 1년 남짓 앞두고 피나투보화산 폭발의 강타를 맞았다. 안그래도 어려운 경제가 엄청난 피해로 기우뚱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멜다에게는 다시없는 기회다.
그러나 필리핀 정부도 만만치는 않다. 당국은 그녀에게 「알카포네식 방법」을 쓰기로 했다. 카포네를 감옥에 보낸 것은 흉악범죄가 아니라 탈세였다. 그녀는 50억달러 상당의 국고횡령과 탈세혐의로 기소돼 있다.
따라서 이멜다는 그녀가 노리는 대권 대신 옥살이 신세를 면치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건망증은 필리핀에만 있는게 아니라 우리주변에도 엄연히 존재한다는데 문제가 있다.<손기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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