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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록 80년대 문화계시련<21>|영화『비구니』제작중단 파동|법정까지 간 "외설시비"|불교계 반발…비구니 시위|"표현자유 침해" 임권택감독등 제명 자청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84년봄 문화계 최대이슈였던 영화 『비구니』 제작중단파동에 대해 연출자인 임권택 감독이나 제작자인 이태원씨 (태흥영화), 그리고 배우 김지미씨는 지금도 어이없어한다.
『비구니』제작팀과 영화계는 「영화의 내용이 비구니의 청정수행을 모독했다」는 이유를 들어 제작중지를 요구해온 불교계와 법정까지 가는 두달 가까운 논쟁과 5공정권의 종용에 결국 손을 들고 말았다.
제작중인 영화가 특정단체의 항의로 중단되기는 한국영화사상 이때가 처음이었고 그후로도 없어 『비구니』는 한국영화사의 깊은 상처의 하나로 남아있다.
당시 영화계는 비구니들의 집단시위가 예술창작의 자유라는 기본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도전이라고 규정짓고 크게 반발했으며 문화계와 불교계는 표현자유의 한계를 놓고 뜨거운 논쟁을 벌였다.
결과적으로 영화계의 「패배」로 끝나자 1급영화인으로 자타가 인정하던 『비구니』의 원작 시나리오작가 송길한씨·임권택감독·정일성 촬영기사는 창작의 자유가 봉쇄되는 풍토에선 영화일을 할 수 없다며 영화인협회에 제명을 자청했었다.
또 삭발까지 감행하며 주연을 맡았던 김지미씨는 울분의 표시로 가발도 안쓴채 다녔고 제작자 이씨는 당시 보통영화3편을 만들 수 있는 2억여원을 영화의 6분의 1쯤 찍고 공중에 날려버려야 했다.
영화계는 영화란 영상·음향등이 합쳐져 전편이 필름에 담겼을때 논란의 대상이 되는 예술작품인데도 도대체 시나리오만 보고 제작중단사태까지 몰고간 불교계의 처사를 지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신상모독과 외설시비를 불러일으킨 『비구니』의 문제화면은 무엇이었나.
불교계는 ▲행자의 수음장면▲주인공 비구니가 입산후 속세에서의 타락상을 회상하는 장면 ▲비구니가 전쟁고아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트럭운전사에게 몸을 허락하다 자신도 성적 충동에 휩싸이는 장면등이 비구니라는 일반인의 호기심을 자극할수 있는 특정집단을 명백하게 상업주의적 외설의 대상으로 삼고있다고 비난했다.
당시 불교계 편에 섰던 소설가 조정래씨는 『표현의 자유는 사회의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엄격하게 구가되는 선택적 자유』라며 『가공적인 한비구니의 성행위는 분명 실재하는 전체 비구니들의 명예를 훼손하는 악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반해 연출자인 임감독은 『정용탁교수(한양대)도 변호했듯이 시나리오만 가지고 본다면 「만다라」는 「비구니」보다 더 외설적일 수 있고 「만다라」의 시나리오에 외설시비가 붙었다면 동남아 불교국에서조차 찬사를 아끼지 않은 이같은 영화는 탄생하지 못했을게 뻔하다』고 말했다.
어쨋든 비구니를 중심으로한 불교계의 『비구니』 제작중지요구는 거셌다.
영화가 크랭크인 된지 보름여후인 4월24일 비구니들은 영화제작을 금지시켜 주도록 당시문화공보부에 진정서를 냈다.
이어 이 문제가 여론화하자 동국대 비구니회 회원28명이 5월14일 『비구니』제작금지 가처분신청을 서울민사지법에 제출했다.
6월10일까지 네차례 열린 심문때마다 비구니들은 법정을 거의 점거, 시위를 했다.
특히 4차 심문이 열린 6월10일에는 전국의 비구니 1천2백여명이 서울조계사에 모여 극영화 『비구니』 제작저지를 위한 전국비구니대회를 열었고 이중 5백여명은 철야법회를 갖고 11일까지 농성을 계속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충돌, 유혈극까지 벌어지자 마침내 태흥영화사는 『예술적으로나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나 가두데모등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데 대한 도의적 책임을 느끼고 제작을 포기한다』고 문공부에 통고했다.
한편 영화인협회등 영화계는 비구니들의 집단항의에 사건초부터 성명등으로 대처는 했으나 질·양에 있어 불교계의 그것에는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또한 문화계의 본산인 예총도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는 예술에 대한 모독과 박해를 즉각 중단하라』는 서명을 발표했으나 이것도 『비구니』 제작을 엄호하기에는 미약한 것이었다.
『비구니』파동의 한복판에서 홍역을 치른 이태원제작자와 임권택감독은 당시 5공과 불교계의 불편한 관계때문에 『비구니』의 소재에 대한 시비가 소동으로, 소동이 파동으로 번져가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아직도 품고 있다.
5공들어서면서 「10·27법난」이란 재앙을 맞고 피해의식에 젖어있던 불교계가 『비구니』라는 시비가능한 호재를 포착, 이 기회에 자신들의 실력을 과시키 위해 『비구니』를 속죄양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의문이다.
그때 대회장에는 「비구니영화제작중지」말고도 「불교재산관리법 철폐」「기독교방송의 극영화시도중지」「10·27법난 해명」등을 요구하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이점은 불교계가 영화 『비구니』 시비를 5공에 대한 불교계 전체의 불만에 접목, 영화제작 중지외의 목적을 겨냥한 것으로 볼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때문에 정부도 사태가 예기치 않은 국면으로 번져가자 「전국비구니대회」 이전까지 관망하던 자세를 급히 고쳐 제작사에 제작중지를 종용하는등 적극적으로 중재에 나섰다는 것이다.
임감독은 『영화 「비구니」는 자신의 전쟁영화 연출경험과 「만다라」를 통한 불교인식을 결합해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 자신이 섰던 영화인데 강제로 그만둬 깊은 한이 되어버렸다』고 말했다.
어쨋든 비구니파동이 일단락된뒤 시인 고은씨등 문인들은 『예술작품에 대한 논의는 작품이 완성된후 소재와 주제에 대한 논의여야지 물리적 제재로 기울어서는 안되며 그러한 현상은 예술에 대한 선진적 사회의식이 성숙되지 못한 증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임감독과 제작자 이씨는 비구니파동 4년후 불교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만들어 모스크바영화제에서 본상 수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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