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쓰배 미스터리②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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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우선 소림광일 9단의 기권 이유부터 심층적으로 분석해 보자. 소림광일은 일본 프로기사 중 상금 랭킹1위인 일본기단의 제일인자다. 그런 소림이건만 유독 국제기전에서만은 빛을 못 보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징크스가 있어 지난 4년동안 무척 자존심이 상했고, 따라서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려왔다는 얘기다.
3년여전 「제1회 응창기배 세계선수권전」에서 조훈현9단에게 크게 우세했던 판을 역전패 당하고는 그날 밤 술좌석에서 『짧은 기간에 큰 상금을 거머쥘 수 있는 세계선수권전이라 심안이 어두어졌다』고 실토한 일도 있는데 일본이 주최하는 「후지쓰배 세계선수권전」에서도 거듭 실패하자 갈수록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여왔다.
예를 들어 90년6월2일 서울 롯데월드호텔에서 있었던 한국의 소년기사 이창호와의 「제3회 후지쓰배8강전」때 관계자들에게 『어째서 이창호의 초읽기를 한국어로 하느냐』고 억지 항의를 하는 해프닝을 벌여 『무궁정수 같으면 저러지 않았을 터인데 딱하다』는 일본측 관계자들의 뒷말을 듣기도 했다.
이날 바둑이 종반에 접어들고서도 소림의 판세가 좋지 않아 그렇지 않아도 『아부나이, 아부나어』(위험하다, 위험해)를 연발하며 전전긍긍하던 일본측 관계자들은 소림의 생떼에 이중고를 치렀다.
그런 신경전에 말려들었음인지 이창호가 종반에 실착을 범해 소림이 역전승을 거뒀지만 준결승전에서 임해봉에게 패해 역시 도중하차.
참고로 「후지쓰배」의 역대우승자를 살펴보면 제1,2회는 무궁정수9단. 제3회는 임해봉9단이다. 그런데 문제는 금년의 제4회. 조훈현·임해봉·운위평·무궁정수 등 강력한 우승후보들이 모조리 초반 탈락하는 이변이 일어나 소림으로서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셈이었다.
그러나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적수로 생각지 않았던 중국의 전우평9단에게 준결승에서 일격을 맞아 또다시 좌절의 쓰라림을 맛보았으니 말이다.
더더욱 소림이 속상하고 미칠 노릇은 자신에게 그토록 아픔을 안겨준 전우평이 자신의 숙적 조치훈에게는 기권으로 불로소득을 선사했다는 바로 그 점이었다. 이에 신경질이 극에 달한 소림은 3,4위전을 덩달아 기권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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