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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비불 성천상은 고구려서 온 불상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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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동경의 도심지를 벗어나 철도로 1시간 정도 달리면 사이타마 현 고려역에 이르게 된다.
여기저기에서 「고려」라는 이름이 눈에 띈다. 고려역·고려천역 이외에도 고려산·고려천·고려촌·고려신사·고려단지·고려사 등이 그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 지역을 찾는 우리나라 사람이면 누구나 다이 지역에는 고구려 아니면 고려 사람들이 무슨 연유에서인가 집단으로 이주해 살면서 꿈에도 잊지 못할 고국을 기리는 마음으로 자기나라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필자는 고려란 이름이 붙은 곳 중 우선 고려사란 절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신앙목적「최승의 악」>
속칭 「고려사」(고마데라)라고 불리기도 하는 이 절의 정식명칭은 「고려산 성천원승악사」며 진언종 지산파에 속해 있다. 절의 정식명칭이 이렇게 긴 까닭은 산호·원호·사호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곧 고려산은 산호, 성천원은 원호, 승악사는 사호를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절은 모두 이 같은 세 가지 명칭을 지닌다. 이 세 가지 명칭은 그 절의 유래와 신앙적 기능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아 무척 흥미를 끈다. 예컨대 산호인 고려산은 이 절을 이룩한 터전이 고구려 사람들에 의한 것이었음을 나타내고, 원호인 성천원은 이 절의 주된 신앙 대상으로 성천상을 모셨다는 것이며, 사호인 승악사는 신앙적 목적이 바로 「최승의 악」을 업는데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헤아려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절은 대체로「성천원」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이 절에 전해오는 사적지에 따르면 성천원은 원래 716년 국난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온 고구려인 도래집단의 우두머리인 고구려왕 야광, 승려 승악, 그의 제자 성운 등이 처음으로 개창한 이들 일족의 원찰이었다.
이 절이 세워질 때 본존불로 모시게 된 불상이 바로 성천상인데, 야광일족이 고구려에서 망명해올 때 그들의 수호불로 모시고 온 불상이라 전한다. 이 성천상은 지금도 성천원의 비불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그 불상을 좀 친견할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비불이라 볼 수 없다고 거절하면서 비불이 모셔진 불당 앞까지만 안내하는 것이었다.
그 문 앞에는 「성천」이라 두 글자로 쓴 팻말이 있고, 그 아래에 「고구려불 성천존」이라는 팻말을 내걸어 비불 성천상이 고구려 불상임을 일러주고 있다.
이 절에서 발행하고 있는 안내 팸플릿에 성천상의 도상이 소개돼 있다.
그 설명에서 성천상은 고순려왕 재래의 수호불이라 하고 암상의 연화모 위에 좌상을 나타내고 있다. 존안은 보살상과 흡사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나 손은 4비를 나타내 다비의 관음상을 연상하게 한다. 그 왼쪽에는 고려군 고려산이라 적었으며 오른쪽에는 대성환희천왕이라 표기해 놓고 있다.

<한국사람 많이 찾아>
이 상이 고구려 시대의 불상인지는 현재 확인할 길이 없으나 고구려 불상으로 믿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 절에는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성천원에는 성천상 이외에 고구려왕의 묘가 있고, 이 고구려왕의 귀덕을 경모해 신으로 모셔놓은 고려신사가 이 절 가까운 곳에 있다. 고구려왕 야광의 묘는 경내 동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5개의 사암을 쌓은 오중탑으로 되어 있다. 높이 2.3m의 고색을 떤 소박한 탑이며 하모석에 사방불이 조각되어 있는 우리나라 형식의 석탑이다. 풍화로 마모가 심해 조각된 부분의 정확한 양식적 특징을 살필 수 없으나 가마쿠라기 이전의 석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지정문화재로 되어 있다.
이 지방은 예부터 「고려향」이라 불리기도 했는데 3면이 질부산에 둘러싸여 있고 동쪽은 무사시노(무장)평야에 연결되는 농경지대며. 서쪽의 산악지대를 발원지로 하는 고려천의 맑은 물이 동쪽으로 흐르는 산수의 아름다움으로 혜택받은 평화로운 마을이다. 이 같은 고려향이 천수백년에 걸쳐 고구려 도래인들이 망국의 한을 달래며 생의 보금자리로 삼아온 곳이구나 생각하니 벅찬 감회를 달랠 길 없었다.
주지께 하직인사를 하고 돌아오려고 하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래인들에 의한 또 하나의 승악사가 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그곳을 찾지 않을 수 없었다.
원호만 다르고 사호는 같은 승악사다. 이 승악사도 한국에서 건너온 도래인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하며 도래인이 한국에서 건너올 때 호신불로 모셔온 성천상을 이 절의 비불로 모시고 있다는 것도 앞서의 성천원 승악사와 같다. 뿐만 아니라 개산조의 묘를 5층탑으로 해 옥내에 시설하고 있는 것도 앞서의 승악사와 같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먼저 방악사가 고구려 도래인에 의해 세워졌다면 이 승악사는 백제인에 의해 세워졌다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앞의 것은 개산조가 고구려왕 고광이었음에 비해 이 방악사는 백제 왕인의 5세손 왕신이란 것이 다르다.
화재로 사적기가 소실돼 더 이상의 구체적인 것을 알 수 없었으나 우리 민족의 도래인에 의해 창건된 사찰임에는 틀림없어 보였다. 도래인이 바다를 건너올 때에는 다같이 성천상과 같은 호신불을 모시고 왔고 망명지에 이르면 그 호신불을 주불로 하여 절음 세우고 의지처로 삼게 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게 된다.

<백제인도 사찰 세워>
이 절 가까이에는 그밖에도 역시 우리 한민족 출신으로 알려진 행기가 제작했다고 하는 천수관음을 본존으로 한 산구관음이란 절이 있고, 한편 이 절의 법당에는 왕신이의 종이라는 한국종이 전해지고 있다. 이는 왕신이가 716년 이곳에 올 때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한다.
7세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 고구려·백제 계의 구 지배층이 일본으로 많이 망명해왔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망명하는 집단에 관음상·성천상과 같은 호신불이 반드시 필요했고 또한 이들이 정착하게 되면 반드시 그 호신불을 봉안하기 위한 절을 세우고 그 절을 중심으로 문화활동을 하면서 도래인계 문화전통을 오랫동안 전승해 갔던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오늘의 일본에는 이와 같은 도래인들에 의한 우리들의 문화유산이 상당수 전하며 이들 문화는 일본문화 속에서 한 중요한 요소로 자리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홍윤식><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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