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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책읽기] 조선 시대 '사회면 장식했을' 얘기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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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대장간-김홍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한 신분인 데다 장애까지 있는 이를 누가 알아줬겠는가. 대장장이 탄재가 세상과 만나는 유일한 통로였던 아전이 죽었을 때, 그는 세상을 다 잃은 셈이다(책 본문 중).

문 밖을 나서니 갈 곳이 없구나

최기숙 지음, 서해문집, 327쪽, 1만1900원

김유신전.신유복전.박씨전.전우치전 등의 끝에 붙은 전(傳)이라는 말은 한 사람의 일생을 기록하는 하나의 문학 장르를 일컫는다. 세상을 떠난 사람을 기억과 회상 속에 살리고, 글 속에서 영원히 숨 쉬게 만드는 글쓰기다. 이를 통해 인간은 비로소 역사의 공간으로 나오게 되며, 삶은 가치를 더하게 된다.

조선시대 '전'은 대부분 소수자, 즉 낮은 신분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사대부들은 무덤에 부장품과 함께 넣는 묘지문과 비석에 새기는 비문을 통해 일생을 글로 남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양반이 아닌 사람은 누군가 '전'을 써줘야 비로소 세상에 자신의 존재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이들은 비록 신분제에 갇혀 처지는 낮았으나 추구한 가치는 높았다. 남과 다른 치열한 삶을 추구하기도 했고, 기존 가치에 맞서기도 했다. 국문학을 공부한 지은이가 원전을 찾아 한글로 옮기고, 풍성한 해설을 곁들인 이 책은 낮은 곳에서 특별하게 살아간 조선시대 마이너리티들이 펼치는 인물 드라마다.

#거지

임금을 경호하는 용호영의 군악대 책임자로 왕실 종친이 불러도 가지 않던 패두(악공 우두머리) 이씨는 어느 날 패거리를 이끌고 거지들 앞에서 한바탕 풍류판을 펼친다. 부하들을 위한 공연을 부탁하는 호방한 거지 두목에게서 진정한 쾌남자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성대중의 '개수(거지두목)전'에 나오는 이야기다. 지은이는 패두 이씨가 거지에게서 "모순적인 세상에 지친 패두가 거지두목에게서 싱싱한 열정과 패기를 보았을 것"이라고 풀이한다. 거지와 패두 모두 이름은 없어도 한 인간의 모습은 남겼다.

#광기 어린 화가

지금 컴퓨터 스크린세이버로 인기가 높은 '노엽 달마도'로 유명한 18세기 화가 취옹 김명국의 호방한 삶은 한 세기 뒤 인물인 문신 남유용의 '김명국전'으로 남았다. 이에 따르면 그는 빗에 살아있는 이 두 마리를 세밀하게 그려넣어 이를 본 공주가 살아있는 걸로 착각하게 만드면서 이름을 날렸다. 김명국의 성품은 매이지 않고 자유로웠다. 전통화풍을 배격하고 스스로 개척한 강한 필치의 그림을 주로 그렸으며, 많이 취하지 않으면 그리지 않아 그의 그림에는 기이한 화풍이 많았다. 중이 지옥도를 그려달라고 하자 무시무시한 형틀 앞에 까까중들을 그려넣었다가 항의를 받자 그제야 머리카락을 그려 넣었다는 일화는 그의 해학을 잘 보여준다.

남유용은 김명국의 그림을 본 뒤 그 예술적 기품에 취해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전을 썼다고 한다. 또 27세에 요절한 역관 출신 천재시인 이언진은 그의 작품에 반해 전을 쓴 사람이 당대의 문인인 박지원.이덕무.김조순 등 7명이나 된다. 이쯤 되면 전은 일종의 인물 고고학으로 위상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예인들의 생생한 일화

문인화가 조희룡은 '김홍도전'에서 "그는 그림을 청하는 돈 3000냥이 들어오자 2000냥으로 기이한 매화를 한 그루 사고, 800냥으로 술잔치를 벌였으며, 나머지 200냥으로 쌀과 땔나무를 샀다"며 "큰 돈이 들어와도 하루 생활비가 되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호방한 풍류 예술가로서 김홍도의 모습이 또렷이 살아난다. 짧은 글로 한 인간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전의 깊은맛이 우러나는 대목이다.

#CSI 보는 듯한 그 옛날 사건

이덕무의 '은애전'은 오늘날 신문 사회면 기사와 흡사하다. 정조 시대, 자신의 정절에 대한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는 이유로 노파를 살해한 김은애라는 18세 부인이 주인공이다. 사건이 벌어진 전라도 강진의 관원들은 정절 윤리 강조와 살인 범죄 처벌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결정을 임금에게 미룬다. 결과는 무죄방면. 삼강오륜을 강조하던 조선사회의 생생한 단면이다. 게다가 살인이라는 강력사건을 맡은 관원들이 검시, 증거물 확인, 범인 취조와 주변인물 탐문수사, 대질심문 등을 하는 과정이 그야말로 조선판 CSI(범죄현장 수사대) 드라마를 보는 듯 생생하다. 당시 법의학서인 '무원록'을 보지 않아도 장면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전의 매력이 아닐 수 없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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