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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의 잔' 얼마나 찼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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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비판론자들은 이번 합의가 기껏해야 북한의 핵 활동을 1994년의 북.미 제네바 협정보다 약간 높은 수준에서 제한하는 데 그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작은 양보의 대가로 중유 5만t과 미국의 금융제재 해제, 그리고 한국으로부터의 비료와 식량 지원이라는 풍성한 수확을 거뒀다.

똑같은 사안이라도 잔이 반이나 찼다고 보는 대신 반이나 비었다고 보는 시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이번 합의는 첫 단계에 불과하다. 이 정도 수준의 합의를 위해 밀어붙일 이유는 별로 없다. 후속 회담으로 미뤄진 골치 아픈 협상 과제를 과소 평가해서도 안 된다.

회담 결과를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첫째, 북한의 플루토늄 프로그램이 그동안 전혀 통제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면 이번 합의는 환영할 만하다. 둘째, 베를린에서 있었던 북.미 양자 간 직접 대화 재개와 같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화는 북한에 대한 양보라기보다는 뒤늦게 현실을 받아들인 적절한 조치로 평가된다.

셋째, 최근 회담에서 한국.미국.중국.일본.러시아의 다섯 나라 간에 그 어느 때보다 효과적인 협력이 이뤄졌다는 점이다. 이는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시험발사로 이웃 나라들을 자극한 때문이기도 하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이러한 협력은 환영할 만하며, 앞으로도 지속돼야 할 것이다.

넷째, 회담 참가국들이 논의해야 할 향후 협상 과제는 광범위하고 포괄적이다. 핵확산 방지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실무그룹은 ▶상호 신뢰를 쌓기 위한 수단 ▶휴전조약을 평화조약으로 대체하는 문제 ▶안전 보장과 투명성 확보를 주고받는 방법 ▶미국.일본과 북한의 관계 정상화 등 더 큰 전략적 이슈를 계속 논의할 것이다. 이렇게 광범위한 분야에서 진전이 이뤄진다면 동북아의 안보환경은 크게 개선될 것이다. 6자회담은 이 지역의 새로운 안보체계 구축의 선구자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앞으로 가야 할 길이 쉽지만은 않다. 큰 변수로 한국.미국의 대선과 일본의 참의원 선거가 있다. 2004년 워싱턴과 평양은 미국의 대선 결과를 기다려 보자는 입장이었다. 부시 대통령은 제네바 협정과 비슷한 수준의 합의로는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흔들리게 될 것이라고 염려했다. 김정일은 더 편리한 협상 파트너(민주당으로의 정권교체)를 기다리며 시간을 벌기 위해 지연작전을 폈다.

부시는 '데드 덕'(정치 생명이 다한 상태)은 아니지만 '레임 덕'(임기 말 권력 누수현상)에 빠져 있다. 그는 연임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대선에 출마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그는 정치적 기반을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지난번 6자회담에서 뭔가 합의를 만들어 내는 데 더욱 큰 관심을 기울였다. 민주당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강력한 장치 마련을 촉구했다.

일본은 선거 결과와 관계없이 북한이 납북 일본인 문제 처리에 보다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기를 바라고 있다.

한국의 대선은 북한 핵 협상의 속도와 내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북한은 아마 지금처럼 한국 정부가 계속 관대한 지원을 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현 야당이 집권하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다고 보는 것 같다. 북한이 한국의 대선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핵 회담에서 어떤 중요한 제의를 하게 될지는 알 수 없다. 또한 한국이 한반도 비핵화를 위해 북한에 어떻게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도 분명치 않다.

마이클 아머코스트 전 브루킹스연구소장
정리=한경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