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책의 정치화를 막자/박세일(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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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모두들 우리 경제가 어떻게 되는 것이냐고들 걱정이 대단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경제의 어려움은 실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소비자물가만 보아도 83∼87년에는 연평균 2.8%로 안정적이던 상승률이 이미 88∼90년에 연평균 7.1%로 뛰었고 금년에는 9월말까지 8.9%가 올랐다. 국제수지의 악화도 금년에 갑자기 닥친 일이 아니다.
이미 88년 경상수지가 1백41억달러의 흑자를 기록한 이후 실은 3년째 계속해 매년 70억∼90억달러씩 악화되어 왔고 그 결과가 금년에는 1백억달러가 넘는 적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결국 87년의 6.29선언,88년의 총선과 올림픽 등으로 우리 모두가 들떠 있을 때부터 우리경제의 어려움은 시작된 셈이다.
○단기실적에만 급급
그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이 경제난국·경제위기의 원인은 한마디로 경제정책의 정치화현상에서 온다. 소위 민주화이후 경제정책이 경제논리에 충실하지 못하고 정치목적을 우서해 왔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무엇이 합리적인가에 의해 경제정책이 결정되지 못하고,무엇이 정치적으로 바람직한가에 의해 결정되어 왔다. 어떤 정책이 목소리 큰 이익집단의 요구나 기득권층의 이익에 보다 잘 봉사하는가,대중적 정서나 여론의 향배에 보다 잘 영합하는가에 의해 경제정책이 좌우되어 왔다.
그런데 본래 대중은 전문가들이 아니다. 언론도,여론도 때로는 무책임하고 무사려일 수 있다. 이익집단들도 말로는 국익을 앞세우나 사익추구를 떠날 수 없다.
따라서 경제정책을 이들의 주장과 의견에 내 맡기면 정책은 경제적 합리성과 원칙을 잃고 방황하고 표류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정책은 결국 리프먼(Walter Lippmann)이 이야기하는 연성해결(Soft Solution)만을 찾게 된다.
경제정책중 경제구조와 질서를 바로잡고 성장잠재력을 키우고 기업체질을 강화하는 정책은 외면되고,우선 가시적 효과가 크고 정치적 비용이 적게 드는 인기위주·단기실적위주의 정책만이 선호된다.
그동안 있었던 국제수지 흑자관리의 실패,재정의 방만한 확대,통화관리의 이완,그 결과로서의 인플레,부동산투기,외형성장과 거품경제등 실은 이 모든 것이 바로 정치적 편의주의에 기초한 연성해결의 결과들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정치의 민주화라는 시대적 요구와 경제의 선진화라는 국민적 과제를 동시에 이루어낼 수 있을까.
첫째,대통령을 위시해 정책책임자들이 민주화시대에 걸맞은 올바른 경제정책관 내지는 경제철학을 가져야 한다. 특히 민주화시대에 경제정책의 생명은 경제적 합리성과 원칙,그리고 일관성을 지키는데 있다는 사실,따라서 경제정책은 정치적 편의나 이해관계에 의해 좌우돼서는 안된다는 사실,이에 대한 확고한 지적신념이 필요하다.
○올바른 신념이 중요
권위주의시대의 경제규율은 힘으로 잡았으나 민주화시대의 경제질서는정책의 원칙성과 일관성을 가지고 잡아나가야 한다. 따라서 정책원칙을 지키기 위해 잘못된 여론이 있는 경우 얼마든지 이의 설득에 나설 적극적 신념과 용기가 요구된다. 결국 민주화시대의 경제정책은 경제철학자가 맡아야지 더이상 경제공학자가 맡을 수 없다.
둘째,주요경제정책을 정치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시킬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 나가야 한다. 환언하면 주요경제제도의 민주화가 시급하다. 우선 첫 단계로 다음의 세가지 경제제도,즉 금융통화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그리고 노동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 보장과 전문성 제고부터 시작해야 한다. 금융통화위원회를 명실상부한 통화금융정책의 최고의사결정기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통화정책의 기강도,물가의 안정도,금리자유화등 금융개혁도 정치적 타산이 아닌 경제적 논리에 따라 이루어낼 수 있다.
다음은 공정거래위원회의 정치적 독립성을 높여야 한다. 그래야 독과점구조의 타파도,기업체질의 개혁도,경제력집중의 완화도 중장기계획하에 강력하고 일관성있게 추진할 수 있다. 오늘날 재벌의 문제도 경제적 원칙에 따라 단계적으로 해결해야지 정치적 이해에 따라 즉흥적으로 해결하려해서는 안된다.
끝으로 노동위원회다. 노사관계의 발전을 위해 전문적이고 공정한 제3의 중립기관에 의한 중재·조정노력은 필수적이다. 그러려면 이 기관은 노사양측으로부터 그 엄정중립성과 전문성에 대해 전폭적 신뢰와 존경을 받아야 한다. 지금과 같이 노동위원회가 정치적 불신을 받아서는 앞으로 노사문제의 안정을 기대하기 어렵다.
○편의보다는 원칙을
이들 세 경제제도의 민주화를 위해 위원들의 임기는 최소한 10년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정치와 세론의 영향을 최소화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특히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경제정책은 때로는 정치적 압력에 의해 때로는 인민주의자들의 선동에 의해 끊임없이 시달리고 방황한다. 그리하여 표류하는 경제정책 자체가 경제불안정의 가장 큰 원인이 되기도 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이 땅에 민주주의와 자유경제의 양립을 원한다면 최근 3∼4년간의 경험에서 우리 모두는 뼈아픈 교훈을 배워야 한다. 즉 민주화시대의 경제정책은 「원칙의 문제」가 되어야지 결코 「편의의 문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서울대법대교수·법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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