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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유일 봅슬레이팀 '외운 질주'…그들의 도전이 아름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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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천3백22m 코스를 돌아나오는 데는 1분이 채 안걸렸다. 최고시속 1백40㎞로 질주할 때는 엄청난 맞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취이익'소리를 내며 커브를 돌 때는 몸이 용수철처럼 퉁겨 나가려 했다. 죽음의 공포가 엄습했다. 마침내 브레이크를 잡아당기자 튀어오르는 얼음조각들이 얼굴을 마구 때렸다. 단지 '넘어지지 않았다. 살았다'는 생각뿐이었다."

국내 '유이(唯二)'의 봅슬레이어인 강광배(30).이기로(28)선수가 생애 최초의 공식 대회 완주를 끝낸 뒤 밝힌 소감이다.

강원도청 소속인 이들은 지난달 27일 독일 빈터베르크에서 열린 유럽컵 봅슬레이 2인승 대회에 한국인으로는 처음 참가했다. 월드컵 대회보다 한 단계 아래인 유럽컵에서 이들이 수립한 기록은 1, 2차 레이스 합계 1분53초50으로 47개팀 중 44위. 그러나 이제 갓 걸음마를 뗀 초보 선수들에게는 기록보다 완주의 의미가 더 컸다. 이들은 오는 4일에는 독일 알텐부르크에서 열리는 유럽컵 봅슬레이 2차대회에 도전한다.

이들은 봅슬레이 학교가 있는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를 전진기지 삼아 보름이 넘도록 렌터카로 3천㎞를 옮겨다니며 유럽 투어에 참가하고 있다. 코치도, 응원객도, 주목하는 사람도 없는 외로운 여정이다.

루지.봅슬레이연맹 남기룡 회장에게서 한달여 비용으로 1천5백여만원을 받아왔지만 일주일에 1백만원이 넘는 봅슬레이 대여료가 만만찮아 궁핍한 생활을 감내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국내 봅슬레이의 개척자를 자임하며 꿋꿋이 견뎌내고 있다.

전주대 체육과 선후배 사이인 두 사람은 1998년 나가노 겨울올림픽 당시 루지 대표선수였다. 그러나 대회 직후 후원이 끊어지자 루지를 포기하고 각자 살길을 찾아 나섰다. 강광배 선수는 스포츠 마케팅을 공부하러 오스트리아 인스부르크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고, 현지에서 봅슬레이와 유사한 종목인 스켈러튼에 입문하게 됐다. 당시 인스부르크에서 훈련 중이던 오스트리아 대표팀의 마리오 쿠큰베르크 감독을 알게 돼 기술과 장비를 전수받았다. 강선수는 지난해 솔트레이크시티 겨울올림픽에 스켈러튼 한국대표로 출전했다.

그러던 중 국내 겨울올림픽 유치 활동과 맞물려 강원도청이 봅슬레이팀을 만들게 됐고, 강광배 선수가 창단 멤버로 발탁됐다. 강선수는 국내에서 체육과 강사로 일하던 이기로 선수를 끌어들였다. 두 사람의 다음 목표는 내년 2월 독일 퀘니히제 세계선수권, 그 다음은 2006년 이탈리아 토리노 겨울올림픽 출전이다.

'돈 안되는' 봅슬레이에 뛰어든 이유를 묻자 강광배 선수가 이렇게 답했다.

"젊을 때 너무 쉽게 살면 재미가 없잖아요. 컵라면에 햇반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내고 있지만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들어 좋습니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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