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8)민중벽화 완성전에 강제 철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우중충한 도시의 건물을 아름답게 가꾸자-.
황량한 회색 빛 건물의 외벽에 대형그림이나 그래픽을 그려 넣는 「도시벽화」는 60년대부터 구미에서 새로운 「거리의 미술」로 각광받았다.
우리나라에는 80년대 들어 일부건물에 벽화가 등장하기 시작, 시민들의 좋은 반응을 얻었다.
80년대 중반 민중미술운동이 점차 가열되면서 일부 건물에 「민중벽화」가 등장했으나 곧 당국의 손에 의해 철거되는 시련을 겪어야했다.
86년은 이 같은 민중벽화의 대표적 수난기로 기록된다.
그해 7월 서울 신촌역 앞 건물벽화를 시작으로 8월엔 정릉벽화, 11월엔 경기도 안성벽화가 채 완성도 되기 전에 잇따라 당국에 의해 강제로 지워졌다.
이 벽화들은 당시 20대 젊은 화가들이 공동작업으로 통일에 대한 염원과 노동자·농민의 즐거운 삶의 모습을 담은 내용들이었다.
그러나 당국은 이 벽화들이 『거칠고 자극적이며 의식화되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기습적으로 지워버렸다.
86년7월9일 오후 11시 벽화가 거의 완성되어가던 신촌역 앞 재개발지역의 낡은 3층 건물에 구청·동 직원 50여명이 몰려들어 흰 페인트로 벽화를 덧칠해버렸다.
벽화를 제작하던 대학생화가 6명과 민미협회원 등 10여명이 거세게 항의하며 이들과 몸싸움까지 벌였으나 역부족이었다.
이 낡은 건물은 당시 가난한 화가 6명이 세들어 칸막이로 나누어 서로의 작업실로 사용하는 화가촌을 이루고 있었다.
이 화가촌의 일원이던 남규선씨(여·당시 22세)는 이 지저분한 건물의 외벽에 벽화를 그려 넣으면 좋겠다고 생각, 건물 주인에게 제안해 허락을 받았다.
남씨는 당시 홍익대서양화과4학년 동급생들인 김환영씨(당시27세) 등 5명과 토의해가며 벽화제작 계획을 세웠다.
이들은 한달여에 걸친 토의 끝에 6개 부분으로 나뉜 벽화 『통일과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작업 시안을 마련했다.
『기존의 도시벽화들은 우리의 삶과는 동떨어진 내용들이었습니다. 지역주민들과 대학생들이 오가며 보면서 공감할 수 있는 통일과 공동체적 삶의 기쁨을 담아 보려고 했었습니다.』
이 공동작업의 리더였던 김환영씨를 비롯한 대학생들은 2학년 때부터 당시 서울·경인지역의 민중계열 대학생화가들의 그룹전이었던 「푸른 깃발전」에 참여해 왔었다.
이들은 주머닛돈을 모아 재료비 25만원을 마련하고 사건 10여일 전부터 제작에 들어갔다.
매일 8시간 이상씩 강행군을 했고 제작 일정에 차질을 빚지 않기 위해 「1시간 지각에 1천원 벌금」규정까지 만들어 서로를 격려하기까지 했다.
이들은 건물의 6개 벽면에 ▲백두산천지를 배경으로 한 일하는 노동자와 힘찬 청년 ▲꽃 파는 아주머니 ▲포옹하는 4명의 젊은 농부 ▲천진난만하게 뛰노는 어린이들의 모습 등을 그려나갔다.
그러나 작업이 80%정도 진행된 7일 이 건물을 통깨로 임대하고있던 화가 이동엽씨(당시40세)가 『건물주의 요청』이라며 갑자기 벽화철거를 요구하고 나섰다. 이와 함께 구청·동사무소·경찰서 등에서도 직원이 나타나 철거를 종용했다.
9일 오후까지 사흘동안 강압적 요구는 계속됐으나 화가들과 지원 나온 민미협회원들은 창작의 자유를 앞세워 버텨나갔다.
이 와중에서 1층 벽에 그려졌던 벽화는 1층에 세 들어 있던 동강인쇄(주)측 인부들이 지워버렸다.
이날 오후4시쯤 철거를 강행하려다 완강한 저항에 부닥쳐 일단 철수했던 구청직원들은 오후11시쯤 화가들이 뒤늦은 저녁식사를 하러간 사이 기습적으로 몰려들어 벽화를 지워버린 것이다.
당국은 『벽화내용이 불온하다』며 『광고물설치법 제3조2항에 의해 철거했다』고 밝혔다.
『도시벽화는 도시환경을 미화한다는 측면과 함께 그림이 한정된 공간을 벗어나 일반대중과 예술적 교감을 나눌 수 있다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김씨는 『벽화가 완성되지도 않은 단계에서 예술적 심의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당국이 일방적으로 강제 철거한 것은 5공의 대표적 예술탄압 사례』라고 강조했다.
강제철거사건 후 민미협에서 항의성명서를 내고 화가들이 시청·구청을 오가며 따졌으나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건물은 개조되어 지금은 호프집이 들어섰으나 1층 벽면에 지워졌던 벽화는 희미하게나마 자취를 남기고 있다.
이 같은「민중벽화」소동은 한 달이 채 못돼 또다시 일어났다.
이번엔 화가가 자기 집 담장에 그리던 벽화가 말썽이 됐다.
화가 유연복씨(당시28세·현 민미협사무국장)는 7월24일부터 서울정릉 2동557에 있는 자기집 시멘트담장(17×3m)에 홍익대 서양화과 동문 4명과 함께 대형벽화 『상생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태극무늬를 배경으로 춤추는 남녀 농부와 물고기를 잡는 아이들의 즐거움을 담은 그림이었다.
28일 벽화제작 사실을 발견한 성북경찰서측은 『그림이 주민들에게 혐오감을 주니 지우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유씨 등이 이를 거절하자 8월2일 오후3시쯤 전경1개소대 병력과 구청직원 등 70여명이 몰려들어 그림을 흰 페인트로 지우고 유씨를 연행했다가 3시간만에 풀어줬다.
이튿날 유씨 등이 벽화의 덧칠을 벗기고 복원하자 다시 달려와 복원불가능 하게 지워버리고 화가 5명을 모두 광고물 등 관리법위반(미풍양속 및 도시미관 저해)혐의로 입건했다.
이 사건은 그후 1년 뒤 서울지검에서 무혐의로 일단락 됐다.
유씨는 『당시 벽화제작을 앞두고 인근주민 20여 가구의 의견까지 수렴하고 동의를 받아 내용을 결정했다』고 밝혔다.
신촌·정릉 벽화사건에 이어 그해 11월엔 중앙대 안성캠퍼스 주변의 청룡당구장 건물에 중앙대회화과 재학생 6명이 4×7m 크기의 벽화를 제작했다.
벽화가 완성된 2일 건물주는 『11월3일 학생의 날 기념행사에 학생들의 시위가 예상되니 자극적인 벽화를 지우라』는 경찰의 압력을 받고 학생들이 없는 틈을 타 벽화를 지워버렸다.
결국 86년 당시 당국은 「민중벽화」를 「불법광고물」이라는 엉뚱한 이유를 앞세워 모두 강제 철거해버린 것이다.
정릉사건 현장에서 한 화가는 비관스런 목소리로 이렇게 반문했다.
『파리의 벽화는 「예술품」인데 서울의 벽화는 왜 「불법광고물」로만 보입니까.』<이창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