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허울 좋은 공기업 공모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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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대통령 임기를 1년 앞두고 공기업의 최고경영자(CEO) 선임을 둘러싼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겉으로는 공모 방식을 통해 기관장을 선임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고위 공무원들이 소위 '회전문식 직행인사'를 통해 공기업의 임원으로 진출하는 사례가 부쩍 늘고 있는 양상이다. 이런 임용 방식은 지금까지 비판의 대상이 돼 온 '낙하산 인사'보다 결코 나아졌다고 볼 수 없다.

공기업의 수장을 선임하는 기준으로 전문성이 강조되면서 관련 부처 고위 공무원들이 산하 공기업에 진출하는 사례는 계속 증가해 왔다. 특히 최근에는 고위 공무원들이 산하 공기업에 진출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표를 제출한 뒤 기관장 공모에 응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이것은 당초 정부가 공언한 공정하고 투명한 공기업 사장 선임 방침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 사표 제출과 동시에 산하 공기업 사장 공모에 참여하는 것은 '공모제' 자체를 무력화할 뿐 아니라 관료제의 정당한 임무 수행을 훼손할 수 있다. 후보자 추천권을 행사하고 있는 주무부처의 전직 고위 관료가 공직 프리미엄을 안고 참여하는 허울뿐인 경쟁에 관직 경험이 없는 인사가 출사표를 던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삼고초려의 분위기 속에서 사장에 선임되는 것을 선호하는 한국적 풍토로 인해 경쟁력이 있는 유력 인사일수록 공모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전직 고위 공무원이 기관장 후보로 추천되거나 임용되면 '산하 공기업 사장 자리를 약속받고 퇴임한 것 아니냐'는 사전 묵계 의혹은 더욱 굳어지게 될 것이다.

고위 공무원이 산하 공기업으로 직행할 경우 야기되는 가장 큰 문제는 공기업의 자율성이 손상된다는 점이다. 또한 불필요한 정부 개입을 자초하는 출발점이 될 수도 있다. 나아가 자기 부처 출신이 사장으로 있는 한 해당 부처는 공기업에 대한 바람직한 정책 통제를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없게 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이로 인한 경영상의 비효율은 공기업의 경쟁력 약화를 초래하면서 궁극적으로는 국민 부담의 증대로 귀착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이 예견되는데도 고위 공무원이 산하 공기업에 진출하는 관행이 효과적으로 통제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현행 공직자윤리법이 주무부처의 고위 공무원들이 퇴임과 동시에 산하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의 임원으로 이동하는 데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기업에 적용하고 있는 '퇴직 후 2년 이내 재취업 제한' 원칙마저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는 적용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공직자윤리법을 개정해 불가피한 사유가 명시되지 않은 한 퇴직 후 1년 또는 2년 이내에는 공기업과 준정부기관에 재취업할 수 없도록 명문화할 필요가 있다. 이와 동시에 기관장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선임하고자 하는 인사권자의 결단과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시장에서의 경쟁과 자율적인 내부 혁신을 통한 경영효율성 제고 장치가 미비돼 있는 공기업 부문에서는 기관장의 경영역량이 경영 성과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따라서 공기업의 경영 성과를 제고하기 위해서는 기관장 채용 경로를 보다 다양하게 설계할 필요가 있다. 기관의 특성에 부합하는 전문성과 역량을 갖춘 인사가 공기업 임원에 임용될 수 있도록 개방성.투명성.공정성을 보장하는 임용혁신이 뿌리내려야 한다. 그토록 혁신을 외치던 '참여정부'야말로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주목하고 있는 공기업 임원 인선에서 인사혁신을 실현하고 있음을 보여 줘야 한다. 아울러 선임된 공기업 임원들이 경영역량을 맘껏 펼쳐 볼 수 있도록 경영자율성을 보장하는 데 적극 나서야 할 것이다.

곽채기 전남대 교수·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