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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그까이꺼! 가 보는 거야, 땅끝까지 … 자전거로 지구 반 바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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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아얼진산으로 가는 사막길.[사진 제공=남영호 from05@paran.com]

대장 남영호(30.회사원) 풀리지 않는 갈증 … 그래서 떠난다

산 100여 곳을 오르고 알프스 트레킹에도 참가했다.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다.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결심한 이유다. 남들처럼 비행기로, 차로, 기차로 다니는 여행은 싫었다. 사람 속에 부대끼며 사람 내음을 맡고 싶었다. 고민 끝에 자전거 여행을 택했다. 회사를 그만두고 일행을 모았다. 팀을 '탐험대'라 부르기로 했다. 남씨 자신은 '탐험대장'이 됐다.

대원 최다운(26.서울대 재료공학과 4년) 나의 한계와 싸우련다

'자전거로 대륙 횡단할 사람을 모집합니다.' 인터넷을 검색하다 남영호씨가 올린 글을 발견했다. 가슴속에서 뜨거운 덩어리가 꿈틀거렸다. 여행을 떠나고 싶다, 막연했던 꿈을 현실로 만들기로 했다. 100여 명의 지원자 가운데 유독 그의 '뚝심'이 남씨를 감동시켰다. 그는 선택됐다. 아니 선택했다. 자신의 한계와 싸우는 여행을.

대원 박정헌(37.산악인) 산을 탔다 … 이젠 땅을 가로지른다

2005년 1월 히말라야 촐라체 하산길. 박씨와 함께 등반하던 후배가 크레바스(빙하 속 균열)에 빠졌다. 갈비뼈 두 대가 부러졌지만 그는 후배가 매달린 자일(등산용 로프)을 놓지 않았다. 그 대가로 손가락 8개를 잃었다. 한국에 돌아와 방황하던 중 후배 남영호씨가 그를 찾아왔다. 출발일을 이틀 남기고, 박씨는 결심했다. 수직으로 산을 오르는 대신 이제 수평으로 땅을 가르겠다고.

대원 김형욱(27.세종대 건축학과 4년) 디스크 따위에 질쏘냐

산을 좋아했다. 모험도 좋아했다. 대학 산악부에서 활동했고 지리산.설악산 등에서 연중 150일을 야영하기도 했다. 산사람들과 어울리다 남영호씨와 알게 됐다. 어느 날 남씨가 그에게 말했다.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대륙을 횡단하자." 심장이 두근거렸다. 고질병인 허리 디스크도 결심은 꺾지 못했다. '그깟 디스크 쯤이야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 그는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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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2006.5.6 .............중국 톈진(天津)에서 출발

② 6.4 ..........중국 시안(西安)에서 실크로드 진입

③ 7.7 ........................ 파키스탄 국경 통과

④ 7.12 박정헌.김형욱, 파키스탄 카리마바드에서 포기

⑤ 8.10 .....................버스로 이란 국경 통과

⑥ 9.20 ........................... 터키 국경 통과

⑦10.23..........................터키 실리브리에서 일본인 여행자와 만나 함께 여행하기로 함

⑧ 11.20 ....................이탈리아 베니스 도착

⑨ 12.1 최다운, 프랑스 칸 해안에서 교통사고로 포기

⑩ 12.26 ........................남영호, 포르투갈 리스본 로카곶에 도착.18000㎞ 대륙 횡단 완주

■ 자전거 탐험 이모저모

50kg▶남씨 일행이 제각각 자전거 뒤에 싣고 이동한 짐의 무게다. 자전거와 연결된 트레일러가 20kg, 버너.코펠 등 취사 도구와 자전거 부품, 수리 장비 등이 모두 30kg이었다. 짐을 끌고 달리는 것에 익숙해지기 위해 남씨 일행은 출발 전 국내 도로 2000km를 달리며 연습을 했다. 팀원 모두가 서울에서 대전.속초 등을 오가며 오르막길과 장거리 주행을 훈련했다.

1만8000㎞▶중국 톈진(天津)에서 포르투갈 리스본의 로카곶까지 거리다. 중국.파키스탄.이란.크로아티아.이탈리아 등 13개국을 거쳤다. "북한을 가로질러 갈 수 있었으면 한국에서 로카곶까지 갔겠죠." 남영호씨의 말이다. 왜 땅끝이냐. 일행은 이 질문을 수도 없이 받았다고 한다. "가다가 중간에 그만두면 무언가 미완성인 것 같잖아요. 길 끝까지 가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내 몸과 정신의 한계도 시험해볼 수 있을 것 같았고요."

네팔▶박정헌씨는 지금 네팔에 머무르고 있다. 고산 패러글라이딩과 산악자전거 훈련을 위해서다. 박씨는 올 가을에 스키와 패러글라이딩을 접목시킨 스피드 패러글라이딩을 배울 계획이다. 그는 최근 "7개국 최고봉 무동력 일주를 해보겠다"고 밝혔다. 김형욱씨도 자전거 탐험 이후 네팔로 향했다. 네팔의 산악 지대를 돈 뒤 지금은 새로운 도전을 준비 중이다. 공학도 최다운씨는 이번 횡단 여행을 계기로 장래 계획을 바꿨다. 최씨는 "졸업 뒤 여행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다"며 "이번 자전거 여행이 내 인생을 바꾼 셈"이라고 말하며 웃었다.

235일간의 탐험기

자전거 탐험대의 사연이 중국 신문 톱기사로 실렸다.

# 출발 … 하루 150~200㎞ 주행

2006년 5월 6일 아침 7시30분. 남영호.최다운.박정헌.김형욱 네 남자가 자전거 페달에 발을 올려놓았다. 중국 톈진(天津)에서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1만8000㎞를 자전거로 달리기 위해서였다. 첫날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지도를 잘못 읽어 길을 헤맸고, 주행 거리도 예상보다 길었다. 첫 목적지인 베이징(北京)에 도착한 시간은 밤 11시. "시속 25㎞로 가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느렸어요. 앞이 막막했습니다." 남씨의 말이다.

하루 평균 10시간 주행, 그것도 팀원 각자가 무거운 트레일러를 끌고 달려야 했다. 박씨를 제외한 세 사람은 극한 상황의 경험도 없었다. 주행 중에 다리 근육이 수시로 뭉쳤고 덜컥거리는 안장 때문에 엉덩이가 성할 날이 없었다. 남보다 발이 큰 김씨는 더 애를 먹었다. 피가 잘 통하지 않아 신발의 양 옆을 잘라내기도 했다.

한여름 더위도 복병이었다. 내륙의 5월 한낮 기온은 35도까지 치솟았다. 하늘에선 햇볕이 총알처럼 쏟아지고 땅에선 스멀스멀 열기가 올라왔다. "정헌이 형 덕분에 힘을 냈어요. 엄지손가락으로 핸들을 붙들고 한 마디씩 남은 손가락으로 브레이크를 잡았죠. 손이 불편한 형도 묵묵하게 달리는데….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최다운)

중국 시안(西安)을 지나 실크로드로 접어들면서 페달 속도에 탄력이 붙었다. 팀원들은 하루에 150~200㎞를 주행했다. 닷새를 달리면 하루를 쉬었다. 몸은 점차 힘든 주행에 익숙해졌다. 남씨는 말했다."처음엔 호텔에 도착하면 쓰러져 자기에 바빴어요. 나중엔 익숙해져 시내 관광도 하고 맥주도 마셨죠. 그때부터 여행의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 낙오 … 파키스탄에서 둘 포기

중국 칭하이성의 한 숙소. 마치 수용소 같다.

자전거가 손에 익자 다른 곳에서 잡음이 생겼다. 팀원들 사이에 작은 갈등이 툭툭 불거졌다. 칭하이(靑海)성에서 해발 3200m 산을 올라갈 때였다. 김형욱씨가 눈에 띄게 뒤처졌다. "힘들어 보인다"는 걱정에 김씨가 그때서야 허리 디스크를 털어놓았다. 몸살을 호소하는 김씨 때문에 차를 타고 이동하는 날도 있었다. 남씨는 말했다."아픈 애를 따뜻하게 챙겨줬어야 하는데…. 서로 힘드니까 말이 곱게 안 나왔죠. 형욱이도 많이 서운했을거예요.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해요."

숨 막힐 듯한 풍광은 힘든 여행의 보너스였다. 중국의 카스(喀什)에서 파키스탄 이슬라마바드로 이어지는 '카라쿠람 하이웨이'에선 7000m 높이의 설산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서늘한 빙하 사이를 자전거로 지나기도 했다. 타클라마칸 사막은 팀원들에게 기쁨과 고난을 동시에 안겨준 곳이다. 한없이 늘어선 모래 언덕은 감동적이었지만 뜨거운 모래 알갱이가 불침을 놓는 것처럼 팀원들의 얼굴에 쏟아졌다. 남씨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목표를 세운 이상 여기서 질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열흘 넘은 사막 주행이 고단했던 것일까. 파키스탄에 도착한 뒤 김씨가 "여행을 그만두겠다"고 선언했다. 김씨의 말은 갑작스러웠다. 일정 내내 말썽을 부렸던 디스크가 악화된 때문이었다. 탐험 초반부터 "파키스탄까지만 가겠다"고 했던 박씨도 이쯤에서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혔다. 남은 사람은 두 명. 아직 1만2000㎞의 대장정이 남아 있었다.

7월 13일 아침, 네 명이 달리던 길을 두 남자가 달리기 시작했다. 대화도 없었다. 먼저 떠난 사람들의 빈 자리를 메우기 위해 그들은 묵묵히 달리고 또 달렸다.

# 완주 … 막판 교통사고 불상사

파키스탄에서 일행을 에스코트 해 준 현지 경찰들. 덕분에 길거리 악동들의 해코지를 면할 수 있었다.

둘이 가는 길은 단출했다. 현지인과 어울릴 기회도 많아졌다. 터키에선 낯선 곳에서 길을 잃었다. 어쩔 수 없이 쿠르드족 거주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처음엔 좀 불안했죠. 그런데 사람들이 참 친절했어요. 안심하고 자는데 새벽에 '탕 탕'하는 총소리가 들렸어요. '여기서 죽는구나'싶었지요. 알고 보니 주인 할아버지가 먹을 것을 준비하기 위해 새 사냥을 하는 소리였습니다." 최씨의 말이다.

따뜻한 손길은 곳곳에서 느껴졌다. 파키스탄의 미안찬눈 지역에 머무를 때의 일이다. 갑자기 최씨가 배탈을 앓았다. "호텔 주인 아저씨가 백방으로 뛰더라고요. 병원에 데려다 주고 그 지역에 사는 한국 사람들을 찾아주고…. 나중엔 잘 가라며 눈물까지 글썽였어요."(최다운) 남씨는 "현지인들과 우정을 나눈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자전거 여행에서만 건질 수 있는 체험이었다"고 말했다.

터키 보스포루스 다리를 건너 유럽에 들어간 뒤부턴 순탄한 일정이 이어졌다. 이탈리아를 거쳐 프랑스 해안도로를 달리며 남씨 일행은 오랜만의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방심한 탓이었을까. 사고가 발생했다."어두운 지방도로를 다운이보다 앞서 달리고 있었어요. 뒤에서 '악'하는 소리가 났죠. 다운이가 뺑소니 트럭에 치여 뒹굴고 있었어요." 12월 1일의 일이었다. 현지 의사는 최씨의 손등이 부러져 자전거를 탈 수 없다고 했다. "영호 형이랑 둘이 껴안고 한참을 울었어요. 목적지가 코 앞인데, 정말 서러웠어요."(최다운), "다운이 자전거를 내가 직접 분해했어요. 정말 착잡했어요. 미안하고 후회스럽고, 그때가 가장 힘들었습니다."(남영호)

넷이서 출발했지만 결국 남씨 혼자 남았다. 12월 26일 남씨는 포르투갈 리스본에 도착했다. 최종 목적지인 로카곶을 알리는 표지판이 하나 둘씩 등장하고 그의 눈앞에 파란 바다가 펼쳐졌다. 더이상 길이 없는 그곳. 바로 대륙의 끝이었다. "먼저 와서 기다리는 다운이를 보자 주책맞게 눈물이 쏟아졌죠. 내가 해냈구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뿌듯했습니다."(남영호) "형이 탄 자전거가 미끄러져 내려왔어요. 나도 저기 있어야 하는데…. 아쉬웠죠. 그래도 한 명은 완주했잖아요. 내 한계에 도전했다는 것, 그것만으로 만족합니다." (최다운)

홍주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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