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진보 실패, 대통령과 진보세력 모두의 책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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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며칠 전부터 청와대 브리핑에는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한다'는 노무현 대통령의 글이 올라와 있다. 최장집 고려대 교수 등 자신을 비판하는 진보학자들에게 화가 많이 나서 반론을 쓴 것이다. 최 교수는 수개월 전부터 노 정권은 무능력과 비개혁 때문에 실패했으며 한나라당으로 정권이 가는 것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대통령은 "참여정부 때문에 진보진영이 망하게 됐다는 것은 지나치고 진보진영 스스로 전체를 돌아봐야 한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이라크 파병,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평택 미군기지 등을 반대한 일부 진보세력의 맹점을 지적했다. 대통령의 문제 제기로 국민은 진보세력 중 누가 더 잘못했는지 헷갈리게 되었다.

'노무현 정권 진보 4년 실패'의 책임은 먼저 대통령에게 돌아가야 한다. 4년 전 인권변호사 출신 정치인 노무현은 세대교체와 개혁이란 파도를 타고 대통령이 되었다. 그를 따라 진보세력은 청와대.정부.학계.법조계.언론계.시민운동계 등 사회 전반에 무섭게 등장했다. 386 진보세력은 대통령을 '우리들의 도구'라 불렀다. 그렇듯 대통령은 진보세력의 리더이자 도구였다.

진보세력의 어설픈 역사관.안보관.빈부(貧富)관이 사회를 위협할 때 대통령은 어디에 있었는가. 평택기지에서 국군.경찰이 시위대에 얻어맞아도 그가 임명한 진보파 총리는 시위에 관대하게 대처했다. 급진 반미.친북세력이 맥아더 동상을 공격할 때 대통령이 따끔하게 말한 적이 있는가. 그래놓고도 대통령은 이제 와서 "진보진영의 일부는 평택기지 건설을 반대해 정부를 곤경에 몰아넣었다"고 비난했다.

대통령은 기고문에서 재야 시절 학습한 종속이론.민족경제론.신식민지이론 같은 진보 이론들이 현실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반성했다. 집권 4년 만에 깨달았다니 그동안 국가가 치른 비용은 어떻게 하나. 대통령은 중국에 가서 한국전쟁 공범 마오쩌둥을 존경하는 정치인으로 꼽았고 엉성한 자주론으로 한.미 동맹을 훼손시켰다. 그런 대통령의 그늘 속에서 친북 좌파인사들이 과거사 조사 작업에 참여하고 전교조에 친북 교재가 등장한 것이다.

진보의 실패에는 대통령이 지적한 대로 진보세력 전반의 책임도 적지 않다. 이들은 아직도 한.미 FTA를 반대하며 공공청사에 불을 지르고 거리를 막고 있다. 근로조건과는 관계없는 정치파업으로 공장을 멈춘다. 박정희 독재 시절 긴급조치 위반자들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던 판사들의 이름은 만천하에 내걸면서도 북한에서 벌어지는 가공할 인권범죄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다. 일부 '탈레반 진보세력'은 보안법.사학법 문제로 국회를 뒤집어 놓더니 며칠 전에는 "열린우리당이 보수화됐다"는 희한한 논리로 탈당했다.

최장집 교수는 진보세력에 대해 "그간 개혁에 최선을 다하지도 않았으면서 무작정 보수파 집권만은 막자고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 진보세력에는 아프겠지만 '진보 실패 4년'에 새겨들어야 할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