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세윤의영화만담] '록키 발보아'의 필라델피아 미술관 72계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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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록키 발보아'의 마지막 장면은 감동적입니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스크린에는 필라델피아 미술관 계단을 뛰어올라 아침 해를 맞이하며 만세를 부르는 수많은 사람이 스쳐가지요. 1976년 '록키'가 선풍을 일으킨 이후 지금까지 매일 아침 많은 사람이 록키 흉내를 내며 그 72개 계단을 오른답니다.

미국 언론인 마이클 비테스는 그 유명한 계단을 질주하는 사람 1000여 명을 인터뷰한 뒤 '록키 이야기'(Rocky Stories)라는 책까지 썼습니다 ('뉴스위크' 한국판 2007년 1월 17일자).

"영원히 계단을 뛰어오르겠다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들은 꼭대기에서 너무나 행복하다. '록키' 이상의 의미다. 일종의 통과의례가 됐다. 꿈을 믿고 열심히 일한다면 그것이 얻어진다는 믿음이다."

계단을 오르는 행위는 예부터 주술적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아포칼립토'에 나오는 마야문명의 피라미드도, 불국사의 33계단도 그 계단을 하나하나 밟아 오르는 사람들에게 통과의례 같은 역할을 합니다. 피안의 세계로 접어드는 통로인 셈이죠. 필라델피아 미술관의 72개 계단은 록키와 똑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에겐 불국사 33계단보다 더 신성한 것이겠지요. 사람들은 그 계단 끝에 서서 커다란 두려움을 작은 성취감으로 맞바꿔 내려가던, 그 옛날 록키의 지혜를 체득하려 애쓰는 겁니다.

'록키'에 대해 미국인들, 특히 베이비붐 세대가 느끼는 각별한 동질감은 76년 아카데미상 수상 결과가 증명해 줍니다. 함께 후보에 오른 '택시 드라이버'와 '대통령의 음모'를 제치고 이 단순무식한(?) 권투영화가 작품상을 받았지요. 관객들은 베트남 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을 통해 조국의 현실을 직시하는 대신 어느 무산계급 복서의 무모한 도전을 통해 그간 잊고 지낸 자신의 꿈을 돌아보는 걸 택했습니다.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버티기 위해 링에 오르는 록키, 뚝심과 진심의 가치를 믿는 복서에게서 역사상 가장 현실적인 영웅을 발견하고, 그를 진심으로 응원했던 겁니다.

한때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에는 록키 동상까지 서 있었다지요. 82년 '록키3' 촬영에 써먹을 요량으로 높이 2.5m, 무게 900kg의 동상을 직접 제작한 실베스터 스탤론은 촬영 후 필라델피아시에 기증할 생각이었지요. 이 동상은 이후 오랫동안 미술관의 품위와 대중의 요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게 됩니다.

결국 주 의회가 영구보존 결의안까지 채택했음에도 미술관 측이 강제로 끌어내려 필라델피아 남부 스펙트럼 구장 안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30년 전 '록키'를 만들 당시 끝내 촬영 허가를 내주지 않은 미술관의 보수적인 태도는 하나도 달라진 게 없네요. 그 시절 간 큰 제작진은 인적 드문 새벽 두 시간 동안 '도둑 촬영'을 감행했습니다. 운명적인 계단 오르기가 아무런 준비 없이 몰래 촬영한 즉흥 연기라는 사실. 과연 록키다운 전설이지요? 일명 '록키 같은 삶'의 실체 역시 그런 겁 없는 도전정신일 겁니다.

김세윤 영화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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