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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금빛 도료 '신라 황칠' 찾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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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신라 토기의 바닥에 눌러붙은 덩어리가 황칠이다(左). 위는 현대의 황칠 공예품. 황칠연구소 정병석 소장이 만든 보석함이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제공>

신비의 금빛 천연도료로 알려진 신라의 황칠(黃漆)이 처음 실물로 확인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15일 "지난해 경주 계림 북쪽 황남동 유적에서 토기에 담긴 채 발견된 유기물 덩어리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에 의뢰해 성분을 분석한 결과 신라의 황칠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첨단기기로 측정한 결과 전남 해남에서 자라고 있는 황칠나무의 황칠과 성분이 거의 동일한 것으로 나타났다는 내용이다.

황칠이란 황칠나무 줄기에 상처를 내서 뽑아낸 수액을 정제한 도료. 화려한 금빛이 특징이다. 황칠은 나무나 쇠에 칠하면 좀과 녹이 슬지 않고 열에도 강해 '옻칠 천년 황칠 만년'이란 말이 있을 정도다. 뿐만 아니라 안식향이란 독특한 향기를 풍겨 사람의 신경을 안정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다만 '아름드리 나무에서 겨우 한 잔 넘칠 정도'(다산 정약용의 시 '황칠'에서) 밖에 나오지 않을 만큼 귀했다고 한다. 한국의 특산품으로 고대로부터 중국까지 널리 알려졌고 여러 문헌에 기록이 남아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 "백제가 금칠을 한 갑옷을 바쳐왔는데, 갑옷의 광채가 하늘에 빛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 후기 '해동역사'는 "(황칠나무는)백제 서남해에 나며, 기물에 칠하면 황금색이 되고, 휘황한 광채는 눈을 부시게 한다"고 쓰고 있다. 또한 신라에 칠전(漆典)이라는 특별한 관청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칠의 수요와 공급을 국가 기관에서 관장하였음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삼국 시대에 유행하였던 장식문화임을 알 수 있다.

황칠은 중국에서도 탐냈다. 북송시대 문헌인 '책부원구(冊府元龜)'엔 "당 태종(이세민)이 백제에 사신을 보내 의전용 갑옷에 입힐 금칠(金漆:황칠)을 요청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 동아시아 최고의 도료로 인정받던 황칠은 그러나 임진왜란을 전후해 한반도에서 그 맥이 단절돼버렸다. 나무도 멸종된 것으로 알았으나 1990년대 초 전남 해남 해안가에서 우연히 야생 황칠나무가 자생하는 것이 발견됐다. 이후 이를 이용한 현대 황칠 공예품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옛 황칠은 공예품도 실물도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전설의 금빛 도료'였다.

경주문화재연구소 이주헌 학예사는 "그동안 실체를 밝히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진 황칠이 실물로 확인된 것은 고대 문화를 연구하는데 있어서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조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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