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자의 골프이야기] 홀컵대신 쥐구멍 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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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바야흐로 2년 전 초가을 무렵. 눈만 깜빡거려도 땀이 흐르는 불같은 여름날이 가고 ‘말이 다이어트해야 한다’는 가을이었다.

앞서 3일 연속 남녀 쌍쌍팀(내가 제일 꺼려하는 팀 구성이다)과 라운드하느라 내 입엔 거미줄이 생겼다. 고객님들끼리 신이 나서 볼이고 뭐고 마냥 즐거워 하는 바람에 나는 투명인간이 된 듯 하였다.

그리고 오늘. 남동풍이 부는 바람을 맞으며 떨어지는 빗방울 두어개를 얻어 마시고 새벽 6시43분27초에 출근했다. 그러나 티 오프 시간을 배정 받은 시간은 오전 11시15분 팀이었다. ‘왜 쓸데없이 회사에 그렇게 일찍 갔느냐’고 반문할 분이 계시겠지만 일명 대기조에 걸리면 이처럼 운 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한다.

아무튼 고객님들은 30대 중후반 정도의 신체 건강한 남자 네 분이었다. 티에 나가니 벌써 나와 계셨다. 그러나 우리 팀 칠 차례가 되도록 20여분의 시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퍼팅 연습 한번. 연습 스윙 한번 하지 않았던 지조 있는 분들이었다 . 그들이 티 업 시간까지 한 운동이라고는 간단한 입(舌) 운동뿐이었다. 한 골퍼가 자랑을 했다.

“내가 오늘 골프좀 잘 쳐 볼라구 클럽에 납도 붙였다.”

드라이버에는 납 8g. 3번 아이언에는 7.8g. 5번 아이언에는 7.7g…. 정말로 그의 클럽에는 납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우리팀 티 샷 차례가 거의 임박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팀 고객님 중 한 분(납 붙인 거 자랑한 분)이 눈에 불을 쌍라이트로 켜고 달려와 내게 엉겼다.

“저 정말 미안한데요. 뒤 팀 패스시켜주세요. 제발 뒤 팀이 울 팀 앞으로 가게 해주세요.”

아니 이게 웬 강아지 풀 뜯어 먹고 체하는 소리인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되옵니다. 뒤 팀과 단체팀도 아니고. 아무 이유 없이 바꿀 순 없습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네 분 모두 내게 엉겨붙어 무지 슬픈 눈으로 날 바라보며 제발 살려달라는 투로 내게 애원을 하였다. 뒤 팀의 한 분이 ‘도라이바에 납 붙인 사람’의 직장 상사였던 것이다.

“한 3일 전에 직장 상사님께서 여기 부킹해 놨다고 같이 가자고 한 걸 제가 거짓말치고 집에 일이 있다 하였는데 에이~ 덴장. 여기서 아니. 그것도 하필 뒤 팀으로 만날 게 몹니까. 딱 들켰슴다. 그 분 앞에서 볼을 칠 수는 없슴다. 제발~제발~”

결국 우리의 뒤 팀을 우리 앞으로 패스시켰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첫 티 샷. 그들은 알아서 내게 ‘누나 혹은 누님’이라는 호칭을 날리며 날 받들어 모셔줬다. 문제는 파3 홀이었다. 앞 뒤 팀이 서로 사인을 주고 받는 상황. 앞 팀의 직장 상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어쩔 수 없이 티 샷을 하여야만 했다.

“이런 젠장. 이거 잘 치면 일도 안하고 골프쳤다고 욕할 테고. 못 치면 회사에서 일도 지지리 못하는 게 골프도 못 친다고 핏받을 받을 텐데…. 에이~덴장.”

머릿속이 복잡했던지 그는 깔끔하게 OB를 냈다. 나중에 앞 팀 언니에게서 들은 말이지만 그 팀의 직장 상사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저노므 잉간 일도 못하는 게 골프도 못 칠 줄 알았다.”

그 다음 홀. 직장 상사에게 거짓말한 죄가 얼마나 무서웠으면 티 샷을 하라고 하여도 행여나 직장 상사 뒤에 볼이 떨어질까 걱정돼서 칠 생각을 안했다. 나는 쪽 찢어진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앙칼진 목소리로 “빨랑~ 치세욧 ”라고 다그쳤다.

나는 내가 좀 야박했다는 생각에 이후 그 분에게 “자. 저분에게 받은 스트레스를 지금 공에게 푸세여”라며 끊임없는 용기를 주었지만 그는 알고보니 OB 7단. 뒤땅 10단. 토핑 5단. 수다 17단이었었다. 여러분. 거짓말하면 이렇게 하루가 힘들어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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