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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된 유해' 이규만①] 부인 "국군 포로인줄 알았다면 결혼 안했을 것"

중앙일보

입력

군번 8812170,수도사단 1연대 2대대 7중대 이규만 이등 중사 (부사관급. 1931년생).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그의 묘는 분단의 아픔에 신음한다. 국군 포로로 끌려가 북에서 숨진 지 7년. 유해가 2004년 탈북한 맏딸의 손에 들려 조국의 품에 안기게 되는 과정에서 동강나 상반신은 북한으로 하반신은 남한의 현충원으로 분단됐기 때문이다.

이 중사가 포로가 된 경위를 국방부의 전사자 기록으로 만으론 알 수 없다. 병적 기록부엔 ‘53년 전사’로, 동작동 국립묘지의 위패에는 53년9월25일로 돼 있지만 다시 합장할 때 사용된 기록은 ‘53년8월16일 회령에서 전사’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아무도 확실히 모른다.

2004년 탈북, 한국에 정착한 중사의 맏딸 이연순씨(45)는 “북에서 국군포로라는 과거는 좋지 않은 것이라 아버지는 드물게 툭툭 던지듯 조금씩만 말해주셨다”며 “그 가운데 자주 했던 말씀이 낙동강 전투”라고 말을 시작했다.

6.25 발발 직후 충남 옥천 청년인 이규만은 제주도에서 6개월 훈련을 마쳤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 배치됐다. 그러던 어느 날 엄청난 폭격 때문에 정신없이 몸을 피했다. 둘러보니 어디인지 알 수 없었고, 부대원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부대는 해체됐다. 그는 일단 충남 옥천군 군서면 동평리 고향 집으로 갔다. 거기서 3일간 숨어 있던 그는 부대 복귀를 위해 집을 나섰다가 그길로 인민군에 잡혀 포로가 됐다. 포로로 잡히기 얼마나 전에 이등 중사가 됐는지 이씨는 모른다.

포로가 된 그는 지붕도 없는 열차에 실려 함경북도 끝단의 학포 탄광으로 끌려왔다. 석탄 캐는 광부로 막장에서 씨름하길 한동안. 어느 날 스피커에서 “종전이 됐다”며 방송이 요란했다. “돌려 보낸다”고도 했다. 모두 기쁨에 들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돌연 “못간다”는 방송이 나왔다. 가면 다 죽이기 때문에 보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처자를 남에 두고 온 국군 포로들은 격분했다. 시위를 했다. 인민군은 총으로 진압했다. 일부 탈출자를 제외하면 모두 사살됐다.

이 중사는 탄광에 묶여 발파공이 됐다. 체념한 그는 한참 뒤 길주 태생 19살 전쟁 고아 처녀 이숙옥과 결혼했다. 남편이 국군포로인 줄 몰랐던 부인은 “그저 먹여줄 사람을 찾았다. 알았다면 절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어쨌든 곧 첫딸 연순이 태어났다. 이 중사는 일만 했다. 그렇게 일하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아오지 탄광, 동창탄광 같은 당시 남에서는 죽음의 지옥으로 여겨졌던 탄광 개발에 투입됐다.

딸 연순이 세살 되던 65년 어느 날 이 중사는 오폭발 사고를 당했다. 얼굴 뼈가 함몰되고 오른쪽 대퇴부를 파편이 관통하는 큰 부상이었다. 6개월 병원 신세를 진 뒤 중사는 더 이상 막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탄광에서 쓰는 나무를 캐는 벌목공이 됐다.

스무살 청년이 40세 초반쯤 됐을 때 그는 숯구이로 좌천됐다. 회령 동쪽으로 100리 떨어진 청태 마을 까치산이란 곳이다. 6호정도 밖에 없는 산골에서 하루 종일 혼자 숯만 구웠다.

숯구이 때 아버지는 참 불쌍했고 연순씨는 회상한다. 산골에 박혀 일하면서 열흘에 한번 정도 집에 올 수 있었다. 홀로 작업하느라 말 상대가 없게 된 나머지 이 중사는 실어증 비슷한 언어 장애 증세마저 보였다. 연순씨는 지금도 숯을 보면 마음이 저려온다.

이 중사는 심화를 술로 달랬다. 형님이라고 부르는 국군 포로와 자주 술자리를 가졌다. 전라도 출신인 ‘형님’을 연순씨 형제자매들은 큰 아버지라고 불렀다.

두사람 모두 국군포로라는 말을 입밖에 내진 않았지만 어쩌다 취하면 제주도에서 훈련 받던 얘기, 미군 군용식량인 C 레이션을 먹던 이야기 등등을 했다. 엄마와 연순씨는 기겁을 하며 두 사람의 입을 막곤 했다. 가끔 이 중사는 “통일되면 걸어서라도 한라산을 가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사는 동안 연순은 아버지가 국군 포로란 것을 몰랐다. 좀 이상하다 싶었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몰랐다. 같은 남쪽 출신인 어떤 이는 입당해도 아버지는 못하고, 일을 열심히 해도 진급하지도 못하고 포상도 못받는 것에 답답해 할 뿐이었다. 아버지가 아무 축에도 못끼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바보라고 원망했다.

그러다 사춘기 때 충격이 있었다. 당시 연순씨는 가창대 소속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등교길에 대열에서 혁명 가요를 급우와 함께 부르지 않는 일이 있었다. 그날 아침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아 기분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연순을 불러 머리를 쥐어박고 야단치면서 “무슨 불만이냐”고 했다. 자꾸 머리를 때렸다. 화가 나서 선생에게 의자를 던질 지경이었다. 엄마가 와서 반성문을 쓰고, 연순은 비판의 대상이 됐다. 선생이 시킨 대로 학급 반장은 연순에게 “사상적으로 변질돼 간다. 사상투쟁을 벌여야한다”고 비난했다.

그런데 몇 일 뒤 당 비서의 딸도 대열에서 노래를 부르지 않는 걸 봤다. 연순은 즉각 문제를 제기했지만 아무도 대꾸를 안했다. ‘아 뭔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고 가슴에 맺혔다. 우린 천대를 받는다는 느낌이 더욱 뚜렷해졌다. 감시를 당했고,사상 비판도 자주 당했고, 대학교 진학은 꿈도 몸꿨다.

연순이 아버지의 과거를 접하게 된 것은 23살때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였다. 남반부 의용군 출신이었던 배우자가 될 사람의 아버지는 처음엔 같은 남쪽 출신이라고 흡족해 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무슨 수를 썼는지 비밀로 분류돼 있는 출신 서류를 뒤적여봤다. 그러나 그 아버지란 사람은 당원이면서 검사였기 때문에 힘을 썼을 것이다. 즉각 결혼 얘기는 없던 일로 됐다. 그리고 아주버니가 될 뻔했던 사람이 나를 불렀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포로 귀환병이란 걸 알고 있느냐. 알고 잘 해라. 당신은 감시 대상이다”라고 했다.

모든 게 명백해졌다. 동시에 가슴에 먹구름이 짙게 퍼졌다. 인생이 암울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그러던 어느날 아버지는 “너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 알아두라”며 말문을 열었다. 많이 연 것은 아니지만 과거가 조금씩 드러났다. 당시 북한에서 국군포로 출신이란 것이 무슨 자랑이라고 크게 말을 해줬겠는가.

연순씨는 “국군 포로출신이란 걸 숨기며 살면서 당신 뿐 아니라 자식까지도 탄압을 받는 상황을 봤던 아버지의 가슴은 얼마나 썩어 들어 갔을까를 지금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했다.

한평생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산골에서 송진으로 만든 솔광불 아래 산 이 중사는 2000년 1월 좌골신경 마비증이 오면서 병석에 눕게 됐다. 오발 후유증이었는데 가난해서도 그렇고, 병원도 신통한 곳이 없어 수술을 엄두도 낼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대 소변을 받아낼만큼 아버지의 증세는 위독해졌다.

이 중사는 죽을 준비를 했다. 이 중사는 베게 속에 자신의 과거에 대한 기록과 유언을 숨겼다. 연순씨는 “아버지의 베게를 빨려하면 막무가내로 못하게 했던 기억이 있는데 그 기록들 때문이었다”고 했다.

기록에는 가계도를 그려놨다. 할아버지(이문역),할머니(김정기)이름, 큰아버지와 (이규석),일곱살에 헤어진 고모(이규순), 거기에 고향 집약도도 그렸다. 밤나무 14그루, 감나무 12그루도 예쁘게 그려놨다.

이 중사는 2000년4월13일 삶을 마쳤다. 딸 연순의 무릎에 기대 숨을 거두면서 남긴 유언은 “통일이 되면 걸어서라도 가려했는데 못갈 것 같다.회령의 제일 높은 곳에 일단 묻어라. 그리고 아무 때라도 고향에 묻어다오”라고 했다. 한평생 국군포로라는 멍에를 지고 힘겹게 살았던 이 중사는 그렇게 저세상으로 갔다. 그러나 죽음에도 불구하고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2편에 계속

안성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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