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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부의 파워게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8면

<17면에서 계속>
「Z씨 사건」을 자세히 목격한 쓰루 측근 Q씨는 『이 해프닝은 자꾸만 커튼 뒤로 숨으려는 정경밀착의 생리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며 이렇게 증언했다.
『먼저 쓰루가 홍씨를 사정특보로 추천한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어요. 당시 청와대 사정팀이 열심히 활동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투서마다 조사를 하니 간혹 억울한 기업인이 다치는 경우가 있었죠. 경제총수였던 쓰루는 경제개발을 위해선 기업인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이를 안타깝게 여겼죠. 그래서 쓰루는 후임자를 천거했는데 꼭 이북출신이나 호남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어요. 당시 권부엔 경상도사람들이 많았으니 경상도출신을 쓰면 서로 끼고 돈다고 본 거죠. 그리고 사정을 담당하려면 조금 우직해야한다고 믿어 이북(평북 철산) 출신에다 여러모로 자리에 어울리는 홍씨를 고른 거예요.』 Q씨는 『홍씨는 무리수를 쓰지 않으면서도 원칙대로 밀어붙였고 권부에는 긴강감이 감돌기 시작했다』며 이야기를 계속했다.『홍특보는 상당히 셌어요. 가릴 것 가리면서도 칼을 뽑을 땐 매섭게 뽑으니 주위에서 겁낼 수 밖에요. 그 중에서도 홍씨를 제일 꺼림칙하게 여긴 사람이 HR였죠. HR는 자신이 올리는 정보부 보고와 사정 비서실 보고가 달라 신경이 쓰인 데다가 홍특보가 자신의 뒤를 캐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 매우 심기가 언짢았어요. 돈 문제에 대해선 별로 깨끗하지 못한 걸로 소문난 박종규 경호실장도 홍 특보와 사이가 껄끄러웠죠.
그런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홍씨는 HR의 자금커넥션을 계속 추적한 모양이에요. 그런데 이를 밝혀내려면 정경유착의 비밀을 많이 알고있는 Z씨를 캐야하는데 여기에 브레이크가 걸리는 거예요. 다름아니라 쓰루가 자기의 심복인 Z씨를 감싸준 거죠.』

<육 여사에 석방호소>
Q씨는 『직선적이고 바른 말을 잘하던 쓰루도 이 대목에선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며 이렇게 계속했다.
『아마 Z씨와의 인간적인 유대 때문이었을 거예요. Z씨는 왕초나 HR하고도 가까웠지만 쓰루도 깍듯이 모시면서 총애를 받았거든요. 그런데 문제는 72년 3월 쓰루가 죽고 난 뒤에 터졌어요.
쓰루가 암으로 사망한지 한 달쯤 지나 홍 특보가 「작전」을 시작했어요.
홍 특보의 사정팀은 경제기획원 간부였던 Z씨와 S씨를 데리고 가 이것저것 상세히 캐물었어요. 얼마나 대접이 가혹했는지 「Z씨 Y셔츠에 피가 묻어있더라」는 말까지 은밀히 나돌았었죠.
이 소식을 들은 김 부총리 부인이 육영수 여사에게 달려갔어요. 김 여사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내막은 모르겠다. 그러나 Z씨는 우리 주인영감의 절친한 부하였는데 주인이 돌아가셨다고 사람들이 이럴 수 있느냐. 당장 물러나게 해달라」고 SOS를 청했지요. 육 여사의 도움으로 Z씨 등은 곧 풀러났어요.』
그러나 홍 특보의 고집과 배짱도 만만치 않았던 모양이다. 홍 특보는 사람을 풀어 Z씨가 숨어있을 만한 곳을 다 뒤졌다고 한다. 막판에는 Z씨가 은신해 있던 혜화동 김 부총리 집까지 요원들이 들이닥쳤다. Q씨의 계속되는 증언.
『요원들은 김 여사에게 「사모님이 그 사람을 숨겨놓았다고 하는데 어서 내보내달라」고 했어요. 하지만 김 여사도 호락호락 넘어갈 사람이 아니지요. 남편 못지 않게 박대통령 내외와 가깝게 지내던 사람인데….
김 여사는 임기응변을 발휘했죠. 요원들이 보는 앞에서 박대통령한테 전화를 걸었어요.
김 여사는 옆에서 보기 안타까울 정도로 서럽게 울면서 「각하, 우리가 숨겨놓은 사람이 아
무도 없는데 청와대 사람들이 찾아와 내놓으라고 하니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우리 주인양반이 돌아가시자마자 이런 일이 생기니 서러워 죽겠습니다」고 했어요. 경남 의령 출신인 김 여사도 남편을 닮아 말이 보통 빠른 게 아닌데 울면서 마구 쏟아내니 요원들이 당황할 수 밖에요.

<직원 앞에서도 험담>
결국 요원들은 빈손으로 돌아가고 Z씨는 무사했어요. Z씨는 이 일로 인해 크게 마음을 데었는지 얼마 있다가 사표를 내고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났지요. 그가 알고 있는 비밀을 고스란히 안은 채 말입니다.』
쓰루와 힘겨루기를 했던 인물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왕초 장기영 전 부종리다. 두 사람의 험악했던(?) 관계는 지금도 경제부처 내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을 정도다.
왕초-쓰루의 불협화음은 기본적으로 스타일이 서로 부딪쳐 빚어낸 마찰음이었다고 한다.
64년 5월∼67년10월 부총리를 맡아 1차 5개년 계획(62∼66년)을 끌고 나갔던 왕초는 특유의 보스 기질로 경제부처를 휘어잡았다. 왕초는 「1+1=2」라는 계산엔 얼굴을 찌푸렸고 실무적 효율보다는 에너지 집중식 돌파를 선호했다. 불도저같이 밀어붙였던 왕초는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김학렬 차관(63·6∼66·9)을 제쳐두고 국·과장을 직접 상대했고 이점은 「대한민국 관료1호」라는 쓰루의 자존심을 깊이 건드렸다.
정통 관료출신인 쓰루는 왕초식의 「돌파」를 『무모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불만을 있는 그대로 터뜨렸다고 한다. 쓰루는 부하들 앞에서 『누구를 핫바지 저고리로 아는 모양』이라
며 왕초를 향해 상사에게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험구독설을 퍼부었다.

<정치자금 손대 불만>
여기에다가 왕초가 4인협의체 멤버로 외자도입을 주무르면서 정치자금에 깊숙이 손대고 있는 것도 쓰루는 상당히 못마땅해했다고 한다. 자신도 나중에 정치자금을 만졌지만 쓰루의 주장은 『차관을 주더라도 될 성싶은 기업을 골라야한다』는 것이었다.
경제기획원 관료출신으로 두 사람을 상사로 모셨던 모씨는 이렇게 회고했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요. 차관이 국·과장 앞에서 장관에 대해 몹쓸 욕을 하고 또 장관은 그런 차관을 자르지 않고 허허 웃으며 포용해 주었으니….
물론 왕초가 독불장군식으로 해대고 쓰루를 무시한 것은 문제가 없지 않았지만 욕하는 쓰루를 끌어안은 것은 왕초의 그릇이 컸다고 봐야 합니다. 저뿐만 아니라 당시를 겪었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어요. 그 점은 쓰루도 인정했던 것 같아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내가 쓰루에게 물었죠. 「만약 차관께서 장관자리에 있다면 욕하는 차관을 어떻게 하겠습니까」라고요. 그랬더니 쓰루는 「나 같으면 그런 녀석은 단칼에 잘라버리지」라고 해요. 그래서 내가 「그렇다면 누가 더 스케일이 큰 겁니까」라고 물으니 쓰루는 「그야 왕초지」하고 웃어요. 그러면서도 쓰루는 토를 달더라고요. 「우리는 머리와 손이 거꾸로 달려 있어. 내가 판단력이 좋으니 장관을 하고 왕초가 추진력이 좋으니 차관을 해야 하는데」라고요.』
청와대 경제 비서관(67∼71년)과 8, 9, 10대의원(공화·파주)을 지낸 박명근 씨도 비슷한 기억 하나를 가지고 있다. 『67년 10월 부총리를 그만두면서 왕초는 박대통령에게 인사 드리고 경제수석이던 쓰루방에 들렀어요.
왕초는 「내가 경제수석 방에 들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내가 부총리로 있을 때 당신을 재무장관으로 컴백시키려고 했는데 못해서 유감」이라며 미안하다는 말을 했지요. 왕초가 나가자 쓰루는 나한테 「내가 다른 건 다 자신 있어도 저 양반의 저런 처세술에는 못 당하겠어. 왕초는 역시 오야붕 기질이 있어」라고 하더군요.
쓰루가 박대통령과 가깝기 때문에 왕초가 자르지 못한 점도 있겠지만 왕초는 기본적으로 쓰루의 능력을 인정하면서 그의 모난 기질은 덮어주려고 했던 것 같아요.』

<김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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