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는 누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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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니체는 그의 나이 스물 넷에 바젤대학 고전문헌학부 교수가, 그로부터 한해 뒤엔 정교수가 되었다. 그러다 건강이 여의치 못해 다시 아홉 해가 지난 1879년 대학에서 물러난 후 어느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알프스를 넘나들며 긴 투병생활울 했다. 이 무렵 그의 사상은 난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이러한 곤고한 방랑생활은 그가 1889년 초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발병, 정신병동으로 옮겨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는 이후 마지막 11년을 혼미와 고통 속에서 보내다 1900년 여름에 눈을 감았다.
니체는 이곳 저곳을 전전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보던 1880년대 초·중반에 그의 사상의 대단원이 될 주저를 구상했고, 그것을 『힘에의 의지』로 이름했으면 어떨까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작업에는 옳게 손도 대지 못했다. 취급주제·내용 등을 여러 차례 바꾸어보았지만 작업에 진전이 없었다. 이 주저는 결국 토리노에서의 발병 한해 전인 1888년에 최종적으로 포기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는 이 주저가 구상되던 시기에 집필되었다(1883∼85). 그것은 예의 주저에로 독자를 안내하는 길잡이로 쓰였다. 즉 그 주저가 니체 철학이라는 대성전의 「본채」라고 한다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는 「행랑채」로 지어진 셈이다. 그러다 주저가 햇빛을 볼 수 없게 되면서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차라투스트라는 조로아스터의 독일어 이름으로 여기서는 니체의 사상적 대변인으로 등장하고 있다. 니체는 그의 책에 「모든 사람을 위해서, 그리고 어느 누구틀 위해서도 아닌」이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것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지 못할 독자들에 대한 비웃음이다.
형식으로 보아 시적이며 투로 보아 예언자적인데다 예수의 언행을 빗대어 쓴 듯한 이 저작은 외양으로 볼 때 기존의 철학적 저작의 격에 맞지 않는다. 그러나 내용이 지극히 철학적인데다 후세에 끼친 영향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것이어서 이미 철학사상 필독서의 반열에 들어있는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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