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서도 "정치보다는 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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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가 전통적으로 이집트가 누려온 아랍권 맹주 자리를 넘보고 있다.

이슬람 수니파의 종주국인 사우디는 시아파를 대표하는 이란의 패권장악 기도에 맞서며 중동의 여러 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고 있다. 고유가로 얻은 자신감과 함께 이웃 이라크에서 수니파가 몰락하고 시아파가 권력을 장악한 데 따른 위기감이 이를 부추긴 것으로 보인다.

◆분쟁 해결사로 나선 사우디=팔레스타인의 마무드 압바스 자치정부 수반과 하마스 최고지도자 칼리드 마슈알은 8일 사우디의 성도(聖都) 메카에서 통합정부 수립을 위한 협상을 타결했다. 지난해 말 이후 100여 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한 유혈충돌 사태가 진정될 전망이다.

내전 위기에 몰린 팔레스타인 사태 해결의 물꼬를 튼 이 만남은 사우디의 압둘라 국왕이 주선했다. 범아랍 일간 알하야트는 9일 "이집트가 하지 못한 일을 사우디가 해냈다"고 극찬했다. 사우디가 팔레스타인 문제에 이처럼 극적으로 개입한 것은 1973년 '석유 무기화'를 선언한 지 30여 년 만이다. 지금까지는 팔레스타인과 관련한 모든 분쟁의 중재는 항상 아랍권 맹주로 통하는 이집트의 몫이었다.

이와 함께 사우디는 수니파 종주국으로서 이라크 사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겠다는 의사를 지난해 말부터 밝혀왔다. 압둘라 국왕은 12월 초 "이라크에서 미군이 철군하면 수니파를 재정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새 중동질서에는 새 맹주가 필요=사우디가 영향력 강화에 부쩍 신경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이 중동지역에서 세를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이란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이라크.시리아.레바논, 남쪽으로 쿠웨이트.바레인.오만.예멘 등으로 이어지는 초승달 모양의 시아파 세력권 형성을 시도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맞서려는 것이다.

'정치보다는 경제'라는 중동지역의 의식변화도 사우디의 영향력 강화 시도를 부추기고 있다. 카이로 아메리카 대학 정치학과의 왈리드 카지하 교수는 "정치.군사적 영향력은 강하지만 경제적으론 아랍권의 도움이 필요한 빈국 이집트보다는 다른 나라를 원조할 수 있는 부국 사우디의 역할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집트는 79년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맺은 뒤 중동의 중재자로 활약해 왔지만 경제가 우선하는 새로운 중동질서에는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국의 엇갈린 반응=사우디가 지역 맹주로 떠오르는 것은 중동 질서재편을 시도 중인 미국엔 그리 반가운 것만은 아니다. 친미 국가 사우디가 이란을 견제해주는 것은 좋지만, 수니파 종주국으로서 지역 패권 장악을 시도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사우디의 지역 내 영향력 급부상이 미국의 중동정책을 더욱 복잡하게 할 수 있다"고 7일 지적했다.

카이로=서정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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