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독립 26주년/번영 기반위에 민주화 기지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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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오작동 총리 제한적인 개방정책 추진
싱가포르 독립 26주년을 맞은 9일 고척동(오작동) 총리는 취임이래 처음인 이번 기념식 연설을 통해 지속적 경제번영추구와 아울러 국민들의 자유신장을 다짐했다. 리콴유(이광요) 전 총리가 재직하던 1년 전과는 다른 싱가포르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1년간에 걸친 이광요의 전제통치아래 경제발전을 위해 자유를 포기해온 싱가포르의 사회곳곳에서 넉넉하면서도 보다 자유스런 분위기가 풍겨나오고 있는게 오작동 정부출범 8개월의 변화다.
오 총리는 이미 작년 11월 취임사에서 「보다 친절하고 자유로운 사회건설」을 약속,『가부장적인 접근방식을 지양하고 정부통제를 완화할 것』이라며 싱가포르에도 변화의 바람이 일것임을 예고했다.
오 총리는 엄격하고 카리스마적인 이 전 총리와는 달리 온화하고 합리적인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따라서 신임총리에게 거는 싱가포르 국민들의 기대는 그만큼 클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오총리 취임이후 싱가포르에는 국민들의 막혔던 숨통을 틔어주는 여러 변화들이 잇따라 선보였다.
이제까지 금지됐던 음악상자가 거리에 등장하는가 하면 순회공연에 대한 규제도 상당히 완화돼 흥겨운 거리공연이 심심치않게 벌어지고 있다.
더욱이 외국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와 지난달에만도 홍콩의 육체파 배우 글로리아 입양의 에로물영화가 14편이나 상영되는 등의 현실은 과거라면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다.
이와 같은 싱가포르판 글라스노스트는 정부에까지 깊이 파급된 상태다.
오 총리 스스로가 매주 일요일 간편한 복장차림으로 이웃주민들의 집을 방문,허심탄회한 얘기를 나누고 있다.
딴 목소리는 일절 허용되지 않았던 정치무대에서도 비록 미약하기는 하지만 야당인 노동자당(WP)의 제야라트남 서기장을 중심으로 대정부비판의 목소리가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싱가포르의 변화는 아직도 표면적인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
우선 이 전 총리가 총리에서 물러났다고는 하나 총리직에 버금갈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닌 집권 인민행동당(PAP)의 서기장직은 그대로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총리부 선임장관(고문격)도 겸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이 전 총리가 아직도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한 오 총리의 개혁·개방정책도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지난 88년 7월 의회에 상정돼 지난달 30일 통과된 싱가포르민선대통령선거법도 이 전 총리의 대통령 불출마입장 표명에도 불구,이 전 총리를 위한 포석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즉 장기집권으로 인한 국민들의 불만을 고려,일단 1보 후퇴했다가 현위킴위(황금휘)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오는 93년 보다 강력해진 대통령으로 2보 전진하겠다는 이 전 총리의 계산이 이번 대통령선거법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새 대통령선거법에 따라 오는 93년 탄생될 대통령은 과거 의회에서 간접선출된 의전상의 대통령과는 달리 ▲고위공무원·경찰·군·국영기업체인사에 대한 임명거부권과 ▲국가금융자산 지출에 대한 거부권을 갖는 등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게 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전 총리의 장남인 군 출신의 리시엔룽(이현용) 부총리 겸 무역산업장관이 오 총리의 임기가 만료되는 오는 93년 부친의 후광을 업고 총리직을 계승,부자가 대통령­총리직을 장악할지도 모른다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돌고 있다.
결국 오 총리의 제한적 개혁정책에도 불구,「싱가포르의 봄」이 찾아들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서야 할 산이 중첩돼 있는 셈이다.<진세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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