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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 현장 점검] 다시 일어서는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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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한 복사기 제조회사를 보통명사로 만든 미국의 제록스가 겪은 지난 3년은 '나락으로의 추락'이었다. 이런 회사가 이틀 전 내년도 이익이 올해보다 35%나 늘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존의 아날로그 복사기가 아니라 디지털과 컬러 기술을 접합한 첨단제품으로 승부하겠다는 각오였다. 앤 멀캐히 최고경영자(CEO)는 "올 4분기 순익은 주당 13~16센트로 예상되지만 내년도 순익은 주당 67~72센트로 끌어올리겠다"고 투자자들에게 약속했다.

세계 최대의 통신장비 제조업체인 루슨트 테크놀로지가 자리잡고 있는 미국 뉴저지주 머리힐의 요즘 분위기는 몇달 전과 사뭇 다르다. 이 회사의 홍보실장 메리 워드는 "불황이란 단어와는 올해로 이별하고 싶다"고 말한다. 사실 이 회사만큼 지난 3년간 짙은 어둠 속을 헤맨 기업도 드물다.

루슨트는 1990년대 말 불어닥친 정보기술(IT) 붐을 온 몸으로 즐겼던 대표적인 회사다.

그러나 통신업계의 과잉 투자와 닷컴회사들의 거품이 꺼지기 시작하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지난 3년간 누적적자가 거의 3백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던 루슨트가 지난달 14분기 만에 처음으로 흑자를 냈다.

그러나 아직은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게 월가의 분석이다. 주력인 통신장비 판매가 늘어난 것이 아니라 그동안 밀어붙인 구조조정 덕에 지난 분기(7~9월)에 9천9백만달러(주당 2센트)의 흑자를 냈다는 얘기다.

겨우 적자를 면한 수준이지만 지난해 같은 기간의 대규모 적자(28억1천만달러.주당 84센트)를 감안하면 큰 진전이다. 루슨트의 CEO인 패트리사 루소는 "앞으로 마진이 높은 장비 판매에 주력해 내년엔 확실히 흑자 기조를 굳힌다"고 장담한다.

실리콘밸리의 맹주이자 세계 최대의 반도체 메이커인 인텔의 마진율이 최근 거의 60%에 달한 것도 미국 경제의 회복세를 말해주는 증거다.

통계도 때맞춰 현장의 이런 분위기를 거들고 나섰다. 25일(현지시간) 발표된 지난 3분기 미국의 성장률(잠정)은 추정치를 1%포인트나 뛰어넘은 8.2%(분기 실적을 1년 기준으로 환산한 연율 기준)를 나타냈다.

권위있는 민간 경제연구소인 콘퍼런스보드가 같은 날 발표한 11월 소비자신뢰지수도 전달보다 10포인트나 껑충 뛴 91.7을 기록했다.

지난달 산업생산이 0.2% 늘어나 4개월째 증가세를 이어간 것이나 첨단 기술설비 생산이 전년 동월보다 20% 이상 급증한 것도 기업들의 투자가 살아나고 있다는 좋은 신호다. 게다가 10월의 생산설비 가동률이 75%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인플레 우려 없이 성장을 이어갈 수 있다는 분위기를 조성해 주고 있다.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여전히 디플레를 우려하고 있는 만큼 기업들은 적어도 몇달간은 금리인상 걱정은 붙들어매도 좋을 것이라는 게 월가 이코노미스트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경제 전문가들은 지난 3분기 기업들의 컴퓨터.소프트웨어 등의 구입이 20% 가까이 늘어난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같은 회복세는 부시 행정부의 잇따른 감세정책과 초저금리 정책의 덕을 분명히 본 것이다. 저금리로 주택담보 대출금리가 낮아지면서 가계의 이자비용 절감액은 1천5백억달러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3분기 성장률을 2%포인트 이상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그러나 불안한 대목은 있다. 감세정책의 효과가 지난 3분기에 집중됐고 앞으로는 줄어들 것이라는 점이다. 4년간 활황세를 이어온 주택경기도 언젠가는 꺾일 것이라고 부동산 업계는 보고 있다. 기대만큼 떨어지지 않는 실업률(현재 6%)은 부시 행정부의 가장 큰 고민이다.

백악관의 또 다른 고민은 지표로 나타나는 최근의 회복세가 내년에도 지속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의 전문가는 8%를 넘은 3분기 성장률이 이례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여기에다 쌍둥이(무역 및 재정)적자는 여전히 미국 경제의 취약점이다. 올해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는 국내총생산(GDP)의 5.3%, 재정수지 적자는 4.5%를 웃돌 전망이며 내년에도 이런 현상은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뉴욕 타임스의 칼럼니스트인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최근의 경기회복세는 부시 행정부의 세금 환급과 낮은 이자율에 힘입은 반짝경기"라고 공격한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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