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곳곳서 드높아지는 반일 목소리-일본이 다 삼킨다 공포의 유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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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베를린=유재식·파리=배명복 특파원】

<닛포포비아 만연>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찬탄이 공포로 변하고 있다.
유럽인들이 일본의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동안 어느새 일본은 그들의 숨통까지 파고들어 언제 일본인들에게 목 졸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유럽대륙을 뒤덮고 있다.
「닛포포비아」(일본공포증) 증후군이란 신조어가 등장한지 이미 오래고, 이 증세에 걸린 많은 유럽인들은 주술에 걸린 듯 에디트 크레송(불총리)과 자크 칼베(불푸조 자동차회장) 의 반일·극일 주문에 빠져들고 있다.
신문과 잡지·텔레비전은 하루도 빼지 않고 일본에 관한 얘기로 넘치고 있고, 일본의 위험을 경고하는 책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일본기업에 정복되면 우리도 비문명적 「개미」 신세가 될거라는 경고가 설득력을 발휘하고있다.
일본 샐러리맨의 숨막히는 하루는 유럽인들의 낯익은 TV프로가 됐고, 유럽이 일본의 산업식민지로 전락하는 그날부터 연6주의 휴가도, 하루 두시간의 점심휴식도… 모든게 끝장이라는 수사가 그럴듯하게 먹혀들고 있다.
노골적인 반일발언으로 잇따른 물의를 빚고 있는 크레송총리가 대놓고 일본을 「적」이니, 「침략자」니 매도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전반적 감정을 파악하고있기 때문이다.
그녀가 채택한 표현방식에 대해서는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많은 이견이 있는게 사실이다. 그러나 크레송의 얘기는 일본경제의 유럽침투에 대한 유럽인들의 점증하는 우려와 반감을 분명히 대변하고 있다.
최근 몇년새 부쩍 심해지고 있는 일본기업의 유럽공략은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가위 위협적이다.

<포도밭까지 매입>
일본의 대유럽 투자는 최근 3년새 무려 네배 늘었다. 지난 86년 33억달러였던 것이 87년에는 65억달러, 88년에는 90억달러, 이어 89년에는 1백47억달러로 처음으로 1백억달러를 넘어서면서 그해 전체 해외투자액의 43%를 유럽에 쏟아 부었다.
과거 북미·아시아·유럽순이었던 일본의 해외투자가 이제는 유럽·북미·아시아순으로 바뀌었다. 투자내용도 제조업 중심에서 금융·부동산·서비스 등 3차 산업으로 급속한 전환을 보이고 있다. 유럽 각국의 풍광 좋은 골프장이 속속 일본기업소유로 넘어가고 있고, 프랑스에서는 수십개의 포도밭과 샤토(성) 주인이 일본사람으로 바뀌었다.
반도체에서 컴퓨터, 카메라에서 TV,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시장에 대해서도 일본은 맹공을 퍼붓고 있다.
올상반기 중 일본의 대 EC무역흑자는 1백44억달러로 전년동기에 비해 무려 63%가 늘었다. 이런 추세로 가면 올 연말까지 3백억달러를 넘어 처음으로 대미무역흑자를 앞지르게 될 거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올 들어서도 이미 지난4, 5월 두달연속 대EC무역흑자는 대미흑자를 초과했다.
유럽시장에는 문자그대로 일제가 범람하고 있다. 카메라가게에서 일제가 아닌 카메라는 아예 구경조차 하기 힘들고, 전자제품 상점에도 진열돼 있는.TV·비디오·카세트녹음기의· 대부분이 일본제품이다. 필립스나 톰슨·그룬디히 같은 유럽제품도 없는건 아니지만 그야말로 구색에 불과하다. 유럽산보다 싸면서 성능은 더 좋은데 일제를 안쓸수가 없다는게 유럽 소비자들의 고백이다.
사무자동화기기·통신기기·컴퓨터 등 첨단전자제품으로 갈수록 일제는 더욱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최근 유럽에서 대유행인 랩탑(휴대용 컴퓨터) 시장은 거의 도시바가 휩쓸다시피 하고 있다.
일본이 타깃을 미국에서 유럽으로 바꿔 유럽공략에 혈안이 돼있는 것은 EC통합 때문이라는게 유럽내의 일반적 인식이다.
최근 일본경제의 유럽침략을 커버스토리로 다룬 프랑스의 주간지 렉스프레스는 일본은 장차 유럽시장을 지배하는 나라가 세계경제를 지배하게 될 거라는 점을 제대로 꿰뚫어보고 있다면서 3억4천만명의 거대한 단일시장 탄생은 그 자체로서도 일본에 물실호기가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무섭게 전개되고 있는 일본기업의 집중적인 유럽공략으로 유럽기업들이 설 땅을 잃고 있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그치지 않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자동차와 전자.
자동차산업은 유럽전체 고용의 10%를 지탱하는 유럽의 중추산업이자 간판산업이지만 지금은 일제차와의 경쟁 때문에 허리가 휠 정도다. 가격과 성능·디자인의 3박자를 무기로 유럽시장을 사정없이 파고들고 있는 일제차에 대한 공동대책수립은 유럽산업계 최대의 현안이 되고 있다.

<푸조사 회장 한탄>
자동차산업을 국가적 「자존심」으로 내세우고 있는 독일에서 조차 일제 차는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 일제마쓰다(MAZDA) 자동차를 놓고 「제 차는 독일의 고용을 망치고 있습니다」(Mein Auto Zerstort Deutsche Arbeitsplatze)라는 뜻으로 풀이하는 농담이 유행하고 있을 정도다.
유럽최대의 자동차회사인 폴크스바겐의 칼 한 회장은 EC시장을 일제차에 완전히 열어줄 경우 12만∼14만명의 실업자가 발생한다고 경고하면서 일제차에 대한 계속적인 수입규제를 역설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의 자회사인 아우디사의 피에크회장은 『앞으로 5년내에 일본의 생산성을 따라잡지 못하면 내자리를 아시아인에게 내줄 판』 이라고 탄식하고 있는가 하면 「타도 일본」의기수로 자처하는 프랑스 푸조사의 자크 칼베회장은 『정부가 내말을 안들으면 회장직을 버리고 정계에 투신, 유럽자동차산업 보호를 위해 직접 뛰겠다』고 정부를 위협(?)하고 있다.
유럽 각국별로 일제차에 대해 엄격한 물량규제를 실시하고 있는 현재도 일본은 연간 약 1백25만대(90년 기준)를 유럽시장에 팔아 전체시장의 10%를 점유하고 있다.
EC시장단일화와 함께 수입규제가 풀릴 경우 2∼3년 새판매량이 배로 늘어난다는게 전문가들의 전망이다.
이러한 사대를 막기 위해 EC집행위원회는 시장단일화이후의 일제차 수입규제문제를 놓고 일본측과 밀고당기는 현상을 2년째 계속하고 있다. 현재 협상이 거의 마무리단계에 들어가 시장이 단일화되더라도 오는 99년까지는 물량규제를 계속하며, 99년의 일제차 수입쿼터를 현재와 같은 수준인 1백23만대로 동결하는 선에서 의견접근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일본의 EC현지공장조립분의 쿼터포함여부가 마지막 장애가 되고 있다.

<영국은 합작 희망>
특히 이 문제에 대해서는 EC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도요타·닛산·혼다 등 일본 3개 자동차회사의 현지공장을 유치하고 있는 영국과 미쓰비시현지공장을 건설중에 있는 네덜란드는 현지조립분은 쿼터에서 제외시켜야 한다는 일본측 주장에 동조, EC내 다른 회원국들과 심각한 불화를 빚고있다.
이 두나라 「실업보다는 일본」이란 실리에 입각, EC회원국들 중 일본의 투자유치에 가장 적극성을 보여왔다. 여러 가지 인센티브를 제공해가며 일본기업을 끌어들인 결과 일본의 대EC투자액의 57%가 이두나라에 집중돼 있다.
특히 영국에는 약6백개에 달하는 일본의 유럽내 현지투자기업의 거의 3분의1에 해당하는 1백87개기업이 몰려있어 EC내 다른 나라들로부터 「일본을 위한 트로이의 목마」 「제5의 일본열도」 「일본의 항공모함」이란 혹독한 비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이 유럽공략을 전개하면서 이처럼 유럽국간의 상이한 입장과 이해를 교묘히 이용하고있다는 점도 유럽인들의 반일감정을 자극하는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일본기업은 고용사정이 어려운 지역을 우선적인 투자대상지역으로 선정, 현지주민들의 환심을 사는데 역점을 두고 있다. 닛산이 영국에 현지공장을 세운 곳은 실업률이 특히 높은 서덜런드.
닛산은 이곳에서 2천8백명을 고용, 작년경우 12만대의 닛산프리메라를 생산했다. 특히 닛산은 엔진 등 핵심부품을 제외한 대부분의 부품을 유럽현지에서 조달, 현지부품비율을 80%까지 끌어올림으로써 영국내에서 「유럽경제에 기여하는 일본」 의 이미지를 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이 내미는 당근에 현혹돼 거부감을 못느끼고 빠져드는 사이 점점 일본에 함락 당하고 만다고 많은 유럽인들은 우려하고 있다.
당근 뒤에 올 것은 채찍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속이 곪기로는 자동차보다 전자쪽이 사실 더 심하다. 전자제품이 일제에 눌려 맥을 못추는건 이미 옛날 얘기가 됐고, 전자산업의 3대 첨단분야인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통신·메모리반도체 등에서는 아예 경쟁을 포기한 상태다.
필립스·올리베티·뷜 등 유럽컴퓨터 메이커들은 생존을 위해 수천명씩 감원을 불사했고, 특히 프랑스 국영기업인 뷜은 첨단기술 확보를 위해 일본NEC에 자본참여를 허용, 안방문까지 열어주는 수모를 치렀다.
영국최대의 컴퓨터· 반도체 메이커인 ICL이 일본후지쓰에 완전히 먹혀버리는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핀란드의 유명정보기기 메이커인 노키아 역시 후지쓰의 제물이 됐다.
지난4월말 자크 들로르 EC집행위원장이 유럽의 대표적 전자메이커인 필립스·지멘스·톰슨· 올리베티· 뷜 등 5개사 회장들과 회동, 포도주잔을 앞에 놓고 『25시가 다가오고 있다』며 비장한 각오를 다진 것은 이제는 너무도 잘 알려진 일화가 돼버렸다.
일본경제의 유럽공략을 놓고 유럽의 지도자들은 일본의 세계경제지배 욕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프랑스의 그레송총리는 『일본은 게임의 룰을 지키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욕망을 가진 우리의 적임이 명백하다』고 말해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와 함께 프랑스판 항일구국전선의 쌍두마차를 이끌고있는 칼베회장은 일본의 세계지배욕을 비난하면서 일본인을 무례하고, 전통적으로 외국인에 대해 적대적인 민족이라고까지 몰아붙이고 있다.

<일부선 자성론도>
이와 함께 일본이 경제력에 걸맞는 응분의 국제적 역할을 부담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얼마전 런던에서 열렸던 G7 (선진7개국정상회담)에서 가이후 일본총리가 군축문제를 들고 나오자 프랑스의 미테랑대통령이 『걸프전에서 싸운건 우리지 당신네가 아니었다』면서 일본의 자격에 시비를 걸고 나온 것도 바로 일본에 대한 이같은 불쾌한 감정의 표출로 해석되고 있다.
프랑스의 렉스프레스지는 일본은 더 이상 수출을 안하면 굶어죽을 수밖에 없는 과거의 그런 가난한 나라가 아니라며 일본의 국제적 책무수행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일각에서 자생의 목소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유럽경제 침몰의 일차적 책임은 스스로에 있는데도 유럽에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무력함에서 비롯된 저열한 보상심리에 불과하다고 혹자는 비판하고 있다.
독일외무부 고위관리로 최근 일본의 경제위협에 관한 책을 펴내기도 한 콘라드 사이츠씨는 『일본의 경제전략이 미국에서 유럽중심으로 급선회하고 있는데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 많은 유럽기업들이 일본을 손쉬운 희생양으로 삼고있다』고 지적하고, 『유럽에 반일감정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유럽정부와 기업들이 정보기술과 같은 신 산업분야에서 배(선)를 놓쳤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 이라고 말하고 있다.

<친일 감정도 공존>
일본에 대한 유럽인들의 감정은 분명 이율배반적이다.
일본의 경제지배에 대한 우려의 다른 한편으로는 심하게 말해 「짝사랑」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의 친일감정이 유럽인들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일본문화, 일본 것에 매료돼있는 유럽인들의 모습은 이국적 호기심의 수준을 분명 넘어서고 있다.
유럽 곳곳에서 값비싼 일본횟집이 유럽 손님들로 나날이 번창하고 있고, 일본어학원은 「신비한」 일본말을 배우려는 유럽인들로 차고 넘치고 있다. 일본사람인줄 알고 친근하게 접근하다가도 한국인이라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등을 돌릴 정도로 유독 일본인·일본 것에 대한 유럽인들의 짝사랑은 대단하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크레송과 칼베의 반일주문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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