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책갈피] 패거리를 만드는 건 사람이 아니라 상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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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우리와 그들,
무리짓기에 대한 착각

데이비드 베레비 지음, 정준형 옮김
에코리브르, 510쪽, 2만원

'끼리끼리 논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인다는 얘기일 터다. 그런데 이 책은 그게 아니라 "한 패거리가 되고 나서 비슷해진다"고 말한다. "인간 부류를 형성할 때 당신이 어떤 사람이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1790년 쇼니 인디언 부족에게 포로로 붙잡힌 백인 찰스 존스턴의 예를 든다. 다른 포로라고는 흑인 한 명뿐. "다른 상황이었다면 가까이 하지도 않았을 불쌍한 깜둥이가 내 동료이자 친구가 됐다. 내 마음은 아주 편안했다." 지은이는 그가 '흑인 대 백인'이라는 분류법 대신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 '쇼니 인디언 대 영어 사용자'라는 분류법을 택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든다면 1954년 오클라호마 시의 5학년생 2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실험 결과를 보자. 이 실험은 인간 부류를 형성하는 '코드'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는 일이 가능함을 보여준다. 학생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3주간의 여름 캠프에 초청받는다. 두 그룹은 '방울뱀'과 '독수리'로 명명됐고 그때부터 사사건건 으르렁댄다.

그러나 공통의 과제가 주어지자 양상은 달라졌다. 물탱크 꼭지 뚫는 일이라든가, 비디오테이프 대여를 위해 돈을 갹출해야 한다든가 등등. 소풍을 앞두고 트럭이 고장나자 이들의 분류 체계는 확 무너진다. 방울뱀과 독수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미국 국가를 흥얼거리며 한데 어울린다.

읽다 보면 학연이나 지연 등으로 이뤄진 파벌 의식도 어느 정도 제어가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든다. 지은이가 '부족적 감각'이라고 부르는, 집단 정체성의 문제를 과학적.문화인류학적으로 어떻게 풀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적인 책이다. 서술이 다소 난삽해 책 읽는 속도를 느리게 하는 점이 흠이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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