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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아내잃고 가정 풍비박산/「오대양」희생자 남편의 충격 고백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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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복음침례회 통해 오대양 투신/아파트·퇴직금까지 모두 바쳐
오대양사건으로 부인을 잃은 경남도 공무원 김모씨(42)가 사건 4년이 지난 19일 당시의 실상을 육성으로 털어놔 충격적이다.
오대양집단 변사사건당시 숨진 문모씨(당시 38·전 김해 모여고 교사)의 남편인 김씨는 『오대양에 깊이 빠져든 아내를 설득하려고 자신도 2년간 교회에 나갔으나 부부가 2억여원의 헌금만 바치고 환멸을 느꼈다』고 입을 떼었다.
김씨가 신도였던 부인을 따라 부산시 개금동의 기독교 복음침례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80년 10월. 간선도로변 은행건물 2층 70여평을 교회로 꾸며 서울에서 번갈아 파견된 목사가 설교를 했고 부산과 대구·울산 등지에서 모인 신도 3백여명이 예배에 참여했다.
김씨는 『기독교복음침례회가 성경을 인용,설교하는 것은 일반교회와 비슷했으나 현세보다 내세를 지나치게 강조했고 헌금을 무리하게 요구해 거부반응을 느꼈다』고 회상했다.
74년 3월 공무원이었던 김씨는 모대학 가정교육학과를 졸업한뒤 교사로 부임한 문씨와 한집에 하숙하면서 만난후 3년만인 77년 결혼,부산에서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러나 대학시절 이 교파에서 활동했던 문씨가 79년 8월 옛 교우를 만난뒤로 다시 교회활동을 하면서 일요일은 물론 평일에도 교회일에 전념하는 바람에 부부사이에 갈등이 생겼다.
김씨가 부인을 따라 교회를 찾은 것도 가정불화를 피하고 부인이 믿는 교회의 실상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82년 여름에는 서울집회에서 수중침례(일종의 세례)를 받을만큼 열성을 보였고 그후로 두세번 서울에서 열리는 예배에도 참여했다.
김씨는 『이 교회 예배는 설교보다 헌금을 많이내도록 강요했다』고 말했다. 설교후 간부신도가 『회사가 부도가 날 형편이다. 사업이 확장돼야 나중에 함께 잘살 수 있다』며 자신이 먼저 거액의 헌금을 내놓은후 다른 신도들도 헌금을 내도록 유도했다는 것.
또 『헌금이 믿음의 정도를 나타낸다』며 고액의 헌금을 낼 것을 약속받고 이를 어길 경우 신도들 앞에서 『왜 안내느냐』고 다그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이때문에 김씨도 당시 자신의 공무원봉급 30%가 넘는 10만원을 내기로 약속,3개월만에 낸 적도 있다고 말했다.
82년 11월 서울 근교 가정집 야간집회에서 「자매」로 호칭되는 신도가 고액의 헌금을 요구해 부산으로 귀향하는 동안 『더이상 이 이 교회에 몸담아서는 안되겠다』는 결론을 내린후 관계를 끊었다.
그러나 부인을 설득하는데는 실패,파경직전의 별거상태로 악화됐다.
83년 6월 도청이 경남 창원으로 옮겨진후 그해 10월 이혼서류까지 작성했으나 부인이 『오대양에 투자한 빚을 청산하면 교회활동을 끊겠다』고 말해 갈라서지는 못했다.
부인 문씨는 오대양에서 운영하는 외제주방용품 판매에 관여하면서 교사월급까지 몽땅 털어넣었다. 84년 2월에는 맞벌이로 마련한 부산시영아파트(17평형)까지 몰래 처분하고 그해 6월 10년간의 교직생활을 청산하고 퇴직금까지 바쳤다.
부인이 오대양 부산지사운영에 참여했던 사실도 사망후 알았다.
부인은 84년 국민학교 1학년인 외아들을 『영재교육을 받게한다』며 대전 오대양 학사로 보냈다. 김씨는 아들과 헤어진지 2년6개월만인 86년 9월 수소문 끝에 대전 오대양을 방문,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오대양직원이 김씨를 소형트럭에 태워 먼저 공장견학과 잘 꾸며놓은 유아원·양로원·무공해식품농장 등을 소개한후 학사로 안내,면회를 허용했다.
당시 대전 대문국교 3학년에 다니던 아들은 부자상봉장면을 지켜보는 직원을 의식한듯 『잘있다』는 말만 되풀이해 20여분만에 헤어졌다.
그후 오대양 집단사망사건이 공개되기 이틀전인 87년 8월27일 경찰의 연락을 받고 창원집으로 데려왔다. 경찰이 오대양의 폭행사건을 수사하던중 집단변사 사건이 발생한 현장부근에 숨어있던 아이들과 부녀자등 40명을 발견,참사를 면하게된 셈이다.
김씨의 아들(14·중2년)은 『학사는 아침 저녁 점호를 하면서 군대처럼 운영됐다』고 말하고 경찰에 발각되기 얼마전 학사로부터 차로 옮겨와 직원들이 시키는대로 책상밑에 숨어있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들을 데려온지 이틀후 부산에 있는 부인에게 전화를 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고 오대양사건이후 사망소식을 들었다고 했다.
김씨는 『집사람이 오대양변사사건이 나기 직전에 사채를 받아내기 위해 대전에 갔다가 타인에 의해 변을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자살설을 부인하고 있다.<허상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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