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만세운동은 세력 컸던 천도교서 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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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중앙일보 7월9일자(일부지방 10일) 독자의 광장란에 실린 「유승열씨 지적에 답함」을 읽고 성실히 응답해준 「분수대자」에게 감사를 표하며 몇 가지 다시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지난 6월27일자 분수대 칼럼에 실린 「천도교가…독립청원으로 하자고 주장했다」는 근거가 밝혀지지 않았다. 임중빈 저 『만해 한용운』과 송건호 저 『한국 인물사론』에서도 천도교가 독립청원으로 하자고 주장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위와 같은 분수대의 주장은 분명한 역사 왜곡이 될 수 있다.
둘째, 손범회 선생이 최린으로 하여금 만해에게 동참하도록 교섭한 것인지, 만해가 최린을 포섭해 손범회를 설득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다. 이에 대해 나는 아래와 같은 자료를 제시하며 간략히 결론을 내리고자 한다.
일본 경성 지방법원에서 1919년에 기록한 3·1독립만세운동에 관한 취조문에서 최린 선생은 『한용운이와는 어느때 회합하였는가』의 질문에 답하면서 『수차 동인이 찾아왔으므로 1월 말경 우리들의 계획을 밝힌즉 한용운은 자기도 참가하고 싶다고 말하였다』고 밝혔다. 또한 한용운 선생은 『어떠한 기회에 이 운동에 참가하였는가』에 대한 답에서 『l월27∼28일경 최린을 그 자택으로 찾아가서 잡담을 하던 중 세계 정세를 말하고 민족자결이 제창되어 세계 각국이 독립이 된다는 말을 하면서 조선도 이 기회에 독립이 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일은 많은 사람이 계획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므로 조선에서는 천도교가 제일 큰 단체이니 천도교의 의사는 어떠냐고 최린에게 물으니 천도교에서도 그런 생각이 있다 하므로 나는 같이 힘을 다하겠다고 약속한 후 여러차례 왕복하면서 이 운동을 협의하였다』라고 밝혔다. 최린과 한용운의 만남은 이렇게 서로간에 뜻이 맞아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이지 누가 일방적으로 운동의 취지를 설득시키고자 이루어진 인연은 아니었다.
다만 운동을 수행해나가는 조직과 그 역량·자금조달 등의 문제를 고찰해 볼 때 천도교가 다른 종단보다 월등히 주도적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싶다. 천도교는 짧은 교회사 속에서 동학혁명과 갑신개혁 운동 등을 벌여 사회적 운동의 경험을 미리 축적하였고 중앙 집권적인 교회운영으로 자금조달이 매우 용이하였다. 따라서 기독교에 운동자금 5천원을 지원하는 등 독립선언문 작성에 관련된 일체의 비용을 조달할 수 있었다.
이런 여러 면이 반영되어 33인의 민족대표 중 영도자를 뽑을 때 의암 손범회 선생이 선출되어 지금도 자랑스럽게 탑골공원에는 그의 동상이 우뚝 서있는 것이다. <유승열(서울 중랑구 면목7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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