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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1년차 고교생의 좌충우돌 미국학교 적응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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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초년생. 힘든 시기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일터와 살 곳을 마련해 새롭게 시작하기란 누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 자녀들은 어떨까. 먹고 사는 걱정은 부모의 몫이니 그저 공부만 열심히 하라고는 하지만 그네들이라고 새로운 곳에서 익숙치 않은 언어로 공부하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우랴. 이민 1년차. 한국에 두고 온 친구들은 수능준비로 눈코뜰 새 없는 지금, 오히려 그들보다 훨씬 높은 강도의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리면서 고교생활에 그런대로 익숙해지고 있는 한 고교생의 좌충우돌 미국학교 적응기를 소개한다.

김성은(18)군은 원래대로라면 올 6월에 졸업해야 할 나이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이미 수능을 치렀고 올 봄 대학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성은 군이 미국행을 결심했을 때는 이미 경기도 의정부시에 있는 부용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과정을 마칠때쯤이었다.

먼저 미국에 가 있는 아버지와 언젠가는 합류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미국행 비자가 나오고 나니 생각이 많아졌다. 전교 상위권의 성적이니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합격할 자신이 있었지만 지금 이나이에 미국에서 자란 학생들과 경쟁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그러나 장기적인 시각에서는 아무래도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에 미국행을 결심하고 아버지가 있는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한 것은 지난 해 1월. 정확히 1년 전이다.

우선 학교를 정해 등록해야 했다. 집주소에 따라 LA고교를 찾아가 등록절차를 밟았다. 당시 나이로는 11학년으로 입학할 수 밖에 없었지만 카운슬러에게 간곡히 사정해 일단 9학년으로 입학했다.

학년을 두단계나 낮춘 것이다. 주변에서는 LA고교 수준에 대해 이런 저런 말도 많았지만 일반적으로 한인들이 선호하는 소위 '명문'학군에서는 이렇게 학년을 낮추는 일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에 그냥 LA고교에 남기로 했다.

카운슬러가 정해준대로 스케줄을 받아 학교에 첫 등교했을 때는 9학년 2학기가 막 시작한 시기였다. 한국에서 온 지 얼마 안됐다는 이유로 카운슬러는 ESL(English as Second Language) 즉 영어미숙어반 1 등급반으로 배정해주었다.

멋 모르고 수업에 들어가보니 그야말로 "Hello Tom"식의 초보수준이었다. 처음에는 별 수 없다는 생각에 수업에 들어갔지만 한 2개월이 지나자 더이상은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운슬러를 찾아갔다. '이미 다 배운내용이고 너무 쉽다'고 ESL 2로 올려줄 것을 부탁했지만 이민 2개월차라는 연수로는 설득력이 없었다. 생각끝에 ESL 2교사에게 가서 '이 반에 들어오고 싶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그 교사는 ESL 1 교사와도 얘기해보고 그동안의 성적도 살펴보고 나서 직접 카운슬러에게 얘기해주었다.

그렇게해서 어렵사리 한 등급을 올라갔지만 여전히 수업이 지루하기는 마찬가지였다. ESL 1이나 2등급에 있으면 자연스레 다른 과목들도 모두 ESL 수준으로 배정된다 (LA교육구에서는 ESL이 1A 1B 2A 2B 3 4등급으로 각 한 학기별로 나뉜다. 따라서 절차를 모두 밟으면 ESL에서 3년과정을 마쳐야만 정규반으로 올라갈 수 있다). 이럭저럭 9학년 과정을 마치고 10학년 1학가 됐다. ESL 3으로 올라가면서 다른 과목도 일반 학생들을 위한 수업으로 받을 수 있었다.

Biology World History US History Health Algebra 2 등을 들으면서 이제서야 미국학교에서 공부가 시작되었다는 실감할 수 있었다. 생물이나 수학은 이미 한국에서 배운 내용이었지만 영어강의 영어용어 교과서로 이루어지는 수업이나 과제물을 완성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야말로 영어와의 싸움이 전면전에 돌입한 느낌이었다. 손에서 사전을 뗄 수 없었다. 수업시간이고 점심시간이고 방과후 숙제시간에도 사전은 꼭 필요했다. 하루에 수백개의 단어를 찾아야만 수업내용을 이해하고 심지어 숙제가 무엇인지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10학년 첫 학기를 마쳤다. 성적은 올 A. 교사들은 물론이고 카운슬러도 매우 놀랍다는 눈치와 함께 2학기부터는 영어도 정규반으로 올라가도록 조치해주었다. ESL 4는 그냥 건너뛴 셈이었다. 미국 고등학교에는 '인터세션'프로그램이 있다.

빠른 시간내에 부족한 학점을 채워야 하는 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것으로 필요한 과목을 얼마든지 들을 수 있는 '맞춤'과목반인 셈이다. 다행히 카운슬러의 도움으로 이 인터세션 클라스에서 영어 10(10학년 영어)와 World History 1학기 과정을 마칠 수 있어서 얼마전 시작된 10학년 2학기에서는 정규 10학년 학생들과 같은 수준의 과목을 듣고 있다.

성은 군은 아무래도 영어반 수업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문법이나 단어공부 외에도 고전도서(현재는 '동물농장'을 공부하고 있다)를 2주에 한권씩 읽고 그 내용을 토의하는 시간이 있는데 2주 만에 한 권의 책을 끝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매주 한 번은 읽고 있는 책에서 발췌된 8개의 구절을 통해 그 안에 내제된 의미를 에세이로 적어내는 숙제가 주어지는데 한국어로도 어려운 독후감을 미숙한 영어로 쓰려니 매주 이 숙제가 주어지는 수요일이면 새벽까지 책상앞에서 낑낑거려야 한다고 한다.

문제는 다음 학년이다. 카운슬러와 논의한 끝에 내년 한 해동안 11학년과 12학년 과정을 모두 마치고 졸업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예능과목과 외국어(한국어), 체육 등의 과목은 한국에서 마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어서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내년에는 여기 학생들도 어렵다는 화학을 비롯해 지금도 자신을 가장 힘들게 하는 영어수업을 11학년, 12학년영어로 나누어 2시간이나 연속 들어야 하기 때문에 다음 한 해동안은 매일 매일 자신과의 힘겨운 싸움이 이루어질 것 같다고 한다.

얼마전에는 당분한 폐쇄되었던 코리안 클럽이 부활돼 친구들과 함께 공동회장으로 일하고 있다. 이 클럽에서는 자신과 같이 뒤늦게 미국생활을 시작한 한인학생들에게 학교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큰 역할로 삼고 있다.

"미국 학교생활이 그런대로 재미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지역적 특성 때문인지 학교내 한인학생들중에는 저같이 뒤늦게 미국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여럿 있어요. 서로 사정을 이해하기 때문에 공부도 도와주고 또 대학입학에 대한 정보도 잘 나누어주면서 '동지애'를 느끼기도 하지요."

성은 군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일찍 미국생활을 시작한 이들이 정말 부럽다고 한다. '단 1년만 일찍 왔어도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이 불쑥 불쑥 들기도 한단다. 그러면 자신이 꿈꾸는 UC계열대학에 자신있게 지원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올해 말 대학지원서를 작성해야 하는 입장에서 4년제 대학진학이 힘들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절대 실망하지는 않는다. 혹 이번에 실패하더라도 커뮤니티 칼리지를 통해서 얼마든지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출발이 늦었을 지는 몰라도 목표점을 향한 질주는 계속할 거에요. 어차피 인생은 마라톤이라잖아요. 조금 일찍 출발한 친구들보다 조금 더 열심히, 더 빨리 달리다보면 언젠가는 그들과 만나는 지점이 있겠지요. 본격적인 시합은 그때부터가 될거예요"

USA중앙 김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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