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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박원순 시대를 논하다] 上. 참여정부 점수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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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신영복 교수(右)와 박원순 변호사가 만추의 계절 끝자락에서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한 삶의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박종근 기자]

신영복(申榮福) 성공회대 교수는 사형에서 감형된 무기수 전력이 있다. 박원순(朴元淳)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변호사)는 대학 1학년 때 제적 당한 운동권 출신이다. 한때 그들은 법이 정한 제도권 밖에서 투쟁하다가 합법적 공간으로 들어온 이력을 공유하고 있다. 또 사회 관행이 편의적으로 구분하는 개혁 성향도 비슷하다. 그들의 만남이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그들이 나눈 대화가 이 시대의 주류 담론에 비해 상당히 특별한 것은 사실이다.

사회=우리 사회에서 목도하는 보수와 진보 논쟁은 사회 발전에 유익한 것입니까.

신영복=대결의 측면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한정의 대립구도로 규정하는 것 자체가 지금처럼 보수체제가 완강하게 군림하는 한 또 하나의 억압구조가 됩니다. 그래서 사안별 찬반으로 가는 것이 좋습니다. 남북 교류, 한.미 공조, 이라크 파병 같은 사안별 논쟁에서는 진보 진영이 보수구조의 억압으로부터 다소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박원순=추상적 논쟁일 때는 접점이 없지만, 구체적 사실로 들어가면 접점이 커집니다. 제 전문 분야인 국가보안법조차 의견이 다른 분일지라도 자꾸 얘기하면 합의의 여지가 넓습니다. 보수.진보의 갈등은 인위적으로 부추겨진 요소가 많아요.

申=보수 쪽에서는 새로운 변화 가능성을 부단히 흡수해 자기 변화를 해야 하고, 그걸 못할 때 사회 위기가 되지요. 진보 진영 역시 이 사회의 여러 현실적 제약 조건을 고려해야만 진보가 구체성을 띠고 여러 사람의 신뢰를 받습니다. 이를 무시하고 대결구도로 치달을 때 진보 진영은 래디컬리즘의 올가미를 쓰고, 보수 진영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욕심사나운 집단으로 비칩니다.

朴=보수나 진보는 그 콘텐츠 차이보다 역사성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민중당 출신이 한나라당에 있기도 하고, 독재정권에 몸담았던 사람이 민주당에 가는 것은 정당의 이념이 불분명한 탓도 있지만 역사의 흐름 속에 자신의 위치가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회=혹시 변절과 철새들의 이합집산을 역사성의 차이라는 말로 미화하신 것은 아닙니까? (웃음)

申=몇몇 사람이 보수.진보 양쪽을 왔다갔다 해서 그 의미와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닌지요.

사회=보수와 진보 구분이 세대와도 관련되는데 소위 386세대를 어떻게 보십니까?

申=그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 긍정적인 온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386이 중심이었던 1970~80년대 운동에서 이들은 소총수로 전선에서 뛰었을 뿐 참모부를 장악한 것은 오히려 제도 정치권이었습니다. 소위 형식적 민주화 이후 386이 사회 각 방면으로 흩어졌고, 그래서 시민운동이나 각 부문 운동의 귀중한 자양이 되었습니다.

朴=공공 영역에 끼어들면 패가망신한다는 생각이 우리한테 쭉 있었잖아요. 저도 서울에 올 때 부모님이 세사람 이상 모인 곳에 가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어겼다가 감옥에 갔습니다만…. (웃음) 386세력의 공공 영역 참여는 우리 사회의 민주화 진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습니다.

申=가시적 정치권에 진입한 386도 홈코트가 아닌 어웨이 코트에서 뛰고 있다는 느낌이에요. 기껏해야 상징적이고 선언적 역할인데, 그나마 보수세력에 포위된 상태 아닙니까?

사회=보수와 진보를 세계사적으로 확대하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되는데, 현실 사회주의는 몰락해 역사적 사회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申=현실 사회주의의 무덤에 사회주의 이상도 함께 묻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신자유주의 또는 미국 패권이 적나라하게 관철된 이런 상황에서는 패권주의에의 대항 전선이란 관점에서 사회주의적 가치와 역할에 새로운 평가가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朴=인권 측면에서도 과거 소련이 존재할 때 균형의 힘으로 지켜졌던 것들이 지금 미국의 독주 아래 마구 무너지고 있습니다.

사회=현실 사회주의 붕괴로 자본주의 세계화가 도래했는데요.

朴=이익을 보는 쪽과 손실을 보는 쪽이 분명히 나뉠 뿐만 아니라 손실을 보는 쪽이 훨씬 더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적 생활방식이 지구 끝의 오지 마을까지 침투하면서 자본의 수탈은 점점 더 왕성하고 제3세계의 삶은 점점 더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그나마 긍정적인 점은 세계화의 역효과를 지적하고 해결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도 세계화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申=세계화가 당분간은 역사적 대세가 되겠지만, 그것이 지속 가능한 인류의 발전 모형이 될지는 의문입니다.

사회=세계화에서 남북 교류로 화제를 옮기지요.

朴=햇볕정책 논란과 핵 위기 공방 속에서도 남북 교류는 점점 깊어진다는 느낌입니다. 지난해 추석에 평양에 가서 들었는데 북한 지역에 항상 5백명 가량의 남한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앞으로 어떤 정부가 들어서도 이런 현실은 대세로 굳어질 것 같습니다.

申=북한 인민이 굶주리는 것이 북한만의 책임은 아니지 않습니까? 가게 앞에서 손님이 못 들어가게 막는 훼방꾼이 있으면 그 장사가 잘 되겠습니까? 그런 점에서 퍼주기는 단순한 퍼주기가 아니라 부당한 봉쇄 고리를 풀어주는 열쇠이고, 평화정착으로 가는 비용입니다.

朴=북을 변화시킬 지렛대를 우리가 가져야 하잖아요. 중국과 대만은 연간 1백만명이 왔다갔다해 전쟁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랍니다. 북이 남쪽에 훨씬 더 의지하고 남이 북쪽에 더 많이 투자하면, 평화협정 따위가 없어도 전쟁은 물 건너갈 것입니다. 평소에 주는 것이 있어야만 그걸 안 줄 때 위협이 되고 지렛대가 됩니다.

申=북한을 개방하고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는 것을 남한의 보수진영은 흡수.합병 과정으로 인식하고, 북을 돕는 것은 그 과정을 더 길게 끌 뿐이라고 불만이 대단합니다. 남북의 통일 과정을 어떻게 관리하느냐는 것은 민족 역량의 소모를 어떻게 최소화하느냐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회=남한 사회 일각에서는 흡수 통일조차 싫다는 표정인데요.

申=그러면 오히려 다행이지요. 평화 정착과 평화 공존만 이뤄지면 통일 과정에서 우리가 치를 일의 90%는 치르는 게 아닌가 합니다. 흡수.합병이나 적화통일이라든가 이런 방식의 통일 과정 관리는 이제 그만 포기했으면 좋겠습니다.

사회=두 분은 참여정부의 고위 공직 물망에 오른 적이 있는데 순전히 오보입니까, 아니면…?

申=인수위 시절 국민참여센터에서 여론을 수집하고 추천을 받았던 모양이에요. 구체적 제의는 없었으며, 제가 거론된 사실 자체가 그간의 냉전적 의식이 변한 증거로 보고 싶습니다.

朴=저도 무슨 제의를 받은 적은 없습니다. 그런 생각이 있었으면 지금까지 이러고 있지 않았겠지요.

사회=참여정부 9개월의 업적을 어떻게 보십니까?

申=권력을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하고 출범해 정권의 기초가 매우 취약합니다. 조선조 말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게 보수 기득권을 대변하는 세력이 국회의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란 막강한 외세도 일정하게 그들을 지원하고요. 이런 지형에서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참여정부의 객관적 입지며, 그래서 더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형편이 아닌 듯합니다.

朴=정치가 불안하지 않으냐는 걱정도 있지만, 저는 대통령 권위의 분산을 긍정적 변화로 여깁니다. 과거에는 대통령의 선거자금을 검찰이 조사하거나 주변 인사를 소환하는 일이 없었잖아요.

申=객관적 조건이 열악했던 점은 인정하지만 그래도 전폭적 지지가 어려운 것은 대미 관계.남북 관계.노동 문제를 비롯한 여러 현안에 너무 단기적 처방을 내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지율에 관계없이 장기적 비전으로 밀고 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유감입니다.

朴=집권 초기의 프리미엄을 놓친 것이 아쉽습니다. 어정쩡한 타협 때문에 깜빡 속았다거나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체념이 적잖은 지지자를 돌아서게 하지 않았습니까? 토론하는 것은 좋지만 너무 적대적인 관계로 몰아간 것도 문제입니다. 대통령이란 직책은 국가 원수로서 통합적 기능도 행사해야 하잖아요.

사회=집권 9개월의 성적을 어떻게 채점하시겠습니까?

朴=아직 평가가 이르나 지금까지는 C학점이면 어떤가요.

申=학점에는 잘했다기보다 잘하라는 뜻도 있는데, 그런 맥락에서 B학점은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아직 학기가 끝나지 않았으니….

정리=배영대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jokepark@joongang.co.kr>

*** 신영복 교수는

냉전 시절 대표적 장기수로 손꼽혔던 인물이다. 20년20일을 복역하다 출옥한 후 옥중에서 보낸 편지를 모아 펴낸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으로 감동을 전했다.

1941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경제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돼 복역 중, 88년 특별 가석방됐다. 89년부터 현재까지 성공회대학교에서 '정치경제학''한국사상사'등을 강의하고 있다. '더불어 숲'이란 대안 교육 공동체도 운영 중이다.

*** 박원순 변호사는

우리 사회에서 1990년대 들어 활성화되기 시작한 시민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국내 시민운동 단체들이 연합해 만든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을 지내며 실질적으로 이끌었다. 현재는 '1% 나눔 운동'을 벌이는 '아름다운 재단'의 상임이사로 활동하고 있다.

1956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으나 학생운동으로 곧 제적됐고, 변호사가 된 이후 양심수 사건을 많이 변론했다. 저서로 '국가보안법연구 1,2,3'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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