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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과 나침반] 긴 여운 남기는 '한 뼘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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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당장 내일을 위해 '어떻게 잠을 비축할 것인가'가 더 긴요한 밤들이 적지 않다. 누워서 손을 뻗어 잡을 만한 머리맡에 철학서적을 두는 까닭은 그 책이 간혹 수면제 역할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2003년 늦가을 자정을 한 시간이나 넘기고도 만약 잠이 안 와 뒤척거리다가 무심결에 책 대신 TV리모컨을 들었다가는 큰 낭패를 당할 수 있다. 한 뼘밖에 안 되는 짧은 드라마가 잠을 멀리 쫓아내고 오히려 불면의 밤을 연장시킬지도 모를 일이다.

오전 1시가 다 되어 시작하는 드라마. 그것도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일주일에 네 차례나 하는 드라마. 5분을 넘지 않는 러닝타임. MBC '한뼘 드라마'는 광고라기엔 길고 드라마라기엔 짧다. 친숙한 연기자의 얼굴도 보이지 않는다. 이번 주에는 보헤미안 가수 한대수와 영화 지킴이를 자처하며 '출발 비디오여행'을 진행 중인 홍은철 아나운서가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나는 뱀파이어다'라는 제목도 섬뜩하다. 황당한(?) 캐스팅에 당황스러운 소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화에 가까운 내용을 시종 진지하게 연기한다.

톨스토이 우화 중에 땅 부자 이야기가 있다. 땅을 많이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소유욕이 대단하다. 고을 원님이 그 욕심에 불을 붙인다. 해질녘까지 말을 달려 출발점까지 다시 오면 그가 거쳐 간 영토를 모두 주겠다고 약속한다. 한 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해 온종일 숨 가쁘게 달린 땅주인은 출발점에 이르러 기진맥진, 마침내 죽고 만다. 사람들은 말한다. 그에게 필요한 땅은 편히 누울 수 있는 한 평이면 족한 것을.

방송제작현장에서 간혹 듣게 되는 '지금 예술 하느냐'라는 질문은 찬사가 아니라 실은 번지수를 잘못 찾은 데 대한 비아냥거림이다. 일회성이고 상업성일 수밖에 없는 게 방송이니 작품성보다는 생산성을 고려하자는 것이다. 격전지에서 소총수가 철학(내가 지금 누구에게 총을 겨누고 있지? 도대체 왜?)에 직면하면 전사하기 십상이다. 그냥 '돌격 앞으로' 가야만 한다.

화려한 네온사인 같은 드라마가 판을 치는 형국에 오히려 촛불 같은 한 뼘 드라마가 묘한 긴장감을 안긴다. 타이틀에 작은 글씨로 박힌 연출가의 이름(황인뢰)은 돋보기로 확대해서 보지 않으면 읽어낼 재간이 없다. 그는 먼 길을 돌고 돌아 자정 넘어서야 아늑한 고향으로 돌아왔다. 영상과 문학, 예술과 철학의 접점을 찾으려던 그는 드라마를 오락이 아닌 예술로 만들고 싶었던 몇 안 되는 '작가주의' PD다.

한 뼘 드라마는 한밤에 푸는 수수께끼 같은 프로그램이다. 금방 해답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여운이 길다. 비유컨대 화려한 꽃들이 저마다 자태를 뽐내는 뜰 한 구석에 숨어 있는 네 잎 클로버 같은 프로다. 잠이 오지 않는 날은 잠을 기다리지 말고 5분간의 명상여행에 동행해 보자. 편성의 비무장지대(비록 그것이 지뢰밭일지라도)를 조심조심 따라 걸으며 숨겨둔 희망(땅보다 꿈)을 찾는 재미가 작지 않을 것이다.

주철환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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