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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맛집] 스테이크에 와인 … '품위'를 먹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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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여신 경개여고(白頭如新 傾蓋如故).

'백발이 되도록 만나도 깊어지지 않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수레에 앉아 처음 만났어도 오랜 벗처럼 친해지는 인연이 있다'는 말이다. 서울 광화문 이마빌딩 지하에 있는 스테이크 전문점 '비손(Pishon.02-730-0472)'은 그렇게 섬광처럼 다가와 나를 사로잡았다.

그날, 광화문엔 늦가을 비가 내렸다. 바람이 불고 낙엽도 스산히 누웠다. 밥만 먹기엔 왠지 아쉬운 날, 조금은 이색적인 공간을 찾다가 만난 곳이 비손이다. 한끼의 식사에서도 문화나 철학, 그리고 인생의 의미 같은 거창함을 찾는 치기에 빠져보고 싶었던 나를 끌어당긴 곳이다.

창문 너머 보이는 빨간 무늬의 하얀 식탁보, 기분을 달뜨게 하는 붉은 벽에 취해 아무런 생각없이 문을 열고 들어섰다. 테이블마다 놓인 장미꽃과 그것을 비추는 기다란 색유리등, 고개를 돌릴 때마다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살갑게 다가왔다. 나는 마치 작은 성의 주인이 된 듯했다.

맛은 어떨까? 파스타.스테이크.치킨.연어 등이 적힌 메뉴판을 무시하고 주방장의 추천을 받아 '프렌치 스테이크 풀코스'를 주문했다.

잘 구워진 달팽이 요리가 먼저 나왔다. 눈에 보이는 순간 혀는 뒷전이다. 가슴이 먼저 와인을 찾는다. 달팽이와 와인의 절묘한 어우러짐. 올리브 오일을 곁들인 빵은 아삭한 겉맛과 부드럽고 달콤한 속살 맛이 일품이다. 치즈가 두툼하게 덮인 양파수프는 한 끼 식사로 충분할 만큼 푸짐하다. 샐러드에 이어 나온 스테이크는 소스가 독특하다. 겨자소스다. 주방장이 프랑스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배워 자신의 손맛을 더해 개발한 요리란다. 소스를 듬뿍 찍어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자 부드러운 육질과 겨자 소스가 조화를 이룬 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진다. 풍요롭다. 스산한 가을 끝자락의 한끼 식사가 '먹는'행위가 아닌, 두시간 동안의 격식있고 품위있는 '나만의 축제'가 되었다.

30% 정도 할인된 가격으로 '테이크 아웃'이 가능하다. 저녁시간의 회식 자리나 기념 파티 땐 라틴 댄스나 통기타 연주를 즐길 수 있다. 에덴 동산에 위치해 풍요로움의 상징으로 알려진 성경의 비손강처럼, 맛과 멋이 가득한 비손은 '경개여고'로 내 가슴에 자리잡았다. 오늘부터 광화문에도 강이 흐른다.

이정근(방송작가.제이드팰레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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